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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는 없나요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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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는 없나요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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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역자 후기.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 세’, 차경아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75)에서. 필자 제공

1970년대의 역자 후기.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 세’, 차경아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75)에서. 필자 제공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어렸을 때 추리소설 책에서 역자 후기를 처음 보았다. 일본어판에서 중역한 영미 추리소설들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역자 후기조차 일본어판의 번역이었다. 그 후기들이 대체로 어려웠다는 느낌은 남아 있다. 번영하던 일본 미스터리 출판의 높은 수준 탓이었을 것이다.



후기에는 영국 평론가의 냉소적 논평이 인용되거나, 주인공 탐정의 희한한 뉴욕식 영어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실려 있기도 했다. 그런 해설과 꼬마 한국 독자의 접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흥미로운 세계가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 이해하고 다 공감할 수 있는 류보다는 그런 미지의 느낌을 주는 책에 더 끌려 들어가는 것이 독서 행위의 요점일지도 모른다.



역자 후기가 사라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서평에 “이 책에는 역자 후기가 없다”고 특이사항처럼 적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게 됐다. 후기가 빠진 신간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을 볼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실 나는 역자가 마지못해 쓴 듯한 후기를 보면 “굳이…” 하며 혀를 차는 쪽에 가까웠다. 지금은 아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던 것이다”(‘1984’)라든지, “하녀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좁은 문’) 같은 마지막 문장 다음 썰렁하게 판권 페이지가 등장하면 충격을 받을 것 같다. 역자 후기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마침표가 찍힌 것 같고 안심이 된다. 이런 기대가 비합리적인 것일까? 흔히들 역자 후기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고 한다. 무슨 말 하려는 건지는 알지만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출판계에 있으면서 여러 역자들을 만났다. 1. 정확하게 마감일에 번역 원고와 역자 후기를 함께 보내주는 역자. 보통 역자 후기는 두세 달 뒤에 써도 되지만, 그러면 출판사가 후기 원고료 지급을 빠뜨리는 경우가 많아 방침을 그렇게 정했다고 했다. 2. “원하는 대로 써줄 테니 뭘 강조하고 싶냐”고 묻는 역자. 미처 생각을 못해 머뭇거리니, 직원이라면서 그런 것도 대답 못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3. 자기는 이 책 역자 후기 절대 안 쓸 거니까 미리 다른 해설자를 구해 놓으라고 엄포를 놓는 역자. 4. “이 작가는 이번에 처음 들어봤다”든가 “동의할 수 없는 전개에 번역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가 들었다” 같은, 편집자를 기겁하게 만들 말을 태연하게 후기에 넣는 역자. 다행히 이런 말을 책 나온 다음에 발견하는 사태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솔직함이 역자 후기의 본질 아닐까? 자기가 한 일인데도 약간 남의 일처럼 이런저런 짓궂은 비평을 하는 것. 아무도 관심 없을, 번역 중의 병치레나 출산 등에 관해 쓰는 것. 10명 정도나 알아들을, 원문의 문법적 오류에 관한 장황한 해명. 역자 후기라는 부속물이 우리 옆에서 필수 요소로 존재한 지 100년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들은 꼭 책에 관한 이야기인 것도 아니고 일말의 나르시시즘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 형식에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그것만이 주는 풍미와는 별도로, 어학자이면서 문학자인 번역가라는 독특한 존재의 삶을 얼핏 들여다봐 왔던 건 아니었을까?



역자의 수줍음 때문이든 출판사의 무관심 때문이든 역자 후기라는 문화가 사라질 조짐이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인문적 세계의 영토는 이런 식으로 점점 축소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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