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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 소장파 의원 김일성 앞잡이 누명…‘국회 프락치 사건’ 진실 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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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프락치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 된 정재한에 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49년 7월23일자 지면. 경찰이 파주까지 미행해 신체를 수색한 끝에 국부에서 암호문서를 찾아냈다고 한다. 정재한은 변호인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끝까지 법정에 나오지 않았고, 1949년 9월3일 별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6일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국회프락치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 된 정재한에 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49년 7월23일자 지면. 경찰이 파주까지 미행해 신체를 수색한 끝에 국부에서 암호문서를 찾아냈다고 한다. 정재한은 변호인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끝까지 법정에 나오지 않았고, 1949년 9월3일 별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6일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의 지령을 받는 김일성의 앞잡이로 몰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자와 가족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국가기관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권이 비판적 정치인을 제거한 이 사건의 조작 여부까지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위법한 수사와 가혹행위, 가족 사찰을 밝혀내는 등 진실규명의 첫발을 내디뎠다.



진실화해위는 15일 오후 제105차 전체위원회를 열어 김옥주(1915~1980)·김병회(1916~1987) 의원의 각 자녀가 신청한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해 불법체포와 감금, 고문 및 가혹행위, 후손들에 대한 인권침해 등이 인정된다며 진실규명(피해 확인)을 결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권고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5~8월 이승만 정부가 북한 공작원 정재한에게 포섭된 의원 명단의 암호를 발견했다는 등의 이유로 반정부 성향 소장파 국회의원 15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의원 15명 중 13명이 기소돼 1심에서 3~1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2명이 북한으로 갔다.



김옥주·김병회 의원은 이 사건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6년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해, 그해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기 전 북한으로 갔다. 두 의원 자녀가 진실규명을 신청한 시기는 2021년 6월로 2기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 재임 시절이었는데, ‘월북자’에 대한 진실규명이 필요한지 논란이 일어 ‘조사개시’가 미뤄져왔다. 진실화해위는 ‘국회프락치 사건’ 국회의원들의 월북과 관련한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들이 ‘납북됐는지’ 혹은 ‘자진 월북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6월6일 오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에서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반민특위 강제해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합뉴스

지난해 6월6일 오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에서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반민특위 강제해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합뉴스


진실화해위는 “ 신청인 및 참고인의 진술과 언론보도 내용, 헌병대의 송치의견서, 고백문, 공판기록을 기재한 문서, 참고인의 자서전 내용 등”을 보면 “피해자들이 체포 당시 영장을 제시받거나 범죄사실을 고지받지 못했고, 사법경찰관의 최장 구속 기간인 20일을 초과하여 구금된 사실이 인정되며, 수사 당시 자백 강요 및 고문을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김옥주의 4남인 신청인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아버지가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진술했다. 김옥주의 조카 김진휴가 쓴 자서전 ‘산하’에는 김옥주 의원이 형수(김진휴의 모친)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명색이 이 나라 헌법을 기초한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저항도 해보고, 계엄령 하도 아닌데 군이 조사에 개입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위법한 짓이라고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 찜질이었고, 수시로 당하는 전기고문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다. 여름철인지라 활딱 벗기고 나신으로 콘크리트 바닥에 꿇어 앉히고 물고문 등을 가하는 것을 당하고 나니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중략) 그러면서 ‘형수님, 저는 이제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하는 숙부님의 말씀에 어머님은 펑펑 우시고 말았다.”



김옥주의 4남은 “(국회프락치 사건은) 당시 사건의 주요 증인인 정재한이라는 여성을 사형시켜 재판에서 피고인의 권리를 묵살하는 등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역사를 보면, 경찰이 1949년 6월 남로당 특수공작원으로 지목된 여성 정재한을 수색해 40~50면에 이르는 암호문건을 발견했고, 여기서 국회의원 이름이 등장해 수사가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정재한은 체포된 의원 변호인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끝까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정재한은 1949년 9월3일 다른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국회 프락치’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6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200명 정원의 제헌국회에서 김옥주·김병회가 속한 소장파는 한때 86명에 달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 및 중도세력과 직간접적 연계가 있었고, 외국군 철수,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통일, 반민특위를 통한 친일파 척결, 기업경영권과 이익 배분의 균점을 주장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 모두에게 껄끄러운 상대였다. 또 소장파 의원들이 친일파 척결을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주축이 됐기 때문에 친일경찰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는 시급한 제거 대상이었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률가들’(2018)이라는 책에서 “‘국회프락치 사건’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조작인지를 지금 와서 증명할 방법은 없다. 다만 재판 자체가 충분한 증거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상급심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상당 부분이 무죄로 뒤집혔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다”고 썼다. 다만,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에서 사건의 조작 여부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후손들에 대한 인권침해도 인정했다. 김병회의 장녀는 “큰오빠가 고시 공부할 때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북에 있는 부친 김병회와 내통한 사실에 대하여 조사를 받으며 심하게 고문당한 사실이 있고,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고도 보증인을 구하지 못해서 자살을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김옥주의 배우자와 조카 역시 헌법에서 정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당하여 수사기관으로부터 주기적인 동향 관찰을 당했다고 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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