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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제페토의 피노키오도 제멋대로였건만 [김용석의 언어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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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제페토의 피노키오도 제멋대로였건만 [김용석의 언어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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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제페토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춤도 추고 칼싸움도 하고 재주넘기도 하는 놀라운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 그를 데리고 온 세상을 돌아다닐 계획을 세웠어요. “이름을 뭐라고 붙일까? 음…, 피노키오라고 부르면 좋겠군.” 제페토는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와 몸통, 팔과 다리 그리고 발을 만들었어요. 그러자마자 인형은 제페토의 코끝을 발로 찼어요. 제페토는 자책하듯 중얼거렸어요.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 미리 깨달았어야 하는데…. 하지만 너무 늦었는걸!” 제페토는 인형을 걷게 하려고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피노키오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랐어요. 제페토는 그의 손을 잡고 한발 한발 내딛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다리에 감각이 생기자 피노키오는 혼자 걷기 시작했고 방안을 뛰어다녔어요. 그러다 집 문을 빠져나가 길거리로 뛰어들어 달아나 버렸답니다. 피노키오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온 동네를 난장판으로 만들었어요.



카를로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1883년) 도입부다. 이 이야기는 우선 태곳적부터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잠재하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보여준다. 그건 인형을 만들려는 욕망이다. 인형 만들기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이 인형을 만들고 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 현상은 일상에서도 관찰된다. 아이들이 인형을 잃어버리거나, 부서진 인형 앞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하는 것을 보면, 인형은 보통의 소유물과 분명히 다른 것 같다.



인간이 거울에 비친 자기를 분명히 인식한다는 동물학적 관찰을 바탕으로,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수위의 자아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래서 ‘자기를 닮은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한다. 이는 인간 창조의 신화에 역으로 투영되어 있는데, 태초에 세상을 만든 조물주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형을 만든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한 장난감 인형에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이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또는 휴머노이드에 이르기까지 인형의 역사는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긴 이 두 용어도 사람의 모습, 곧 인형(人形)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안드로이드(android)는 그리스어로 사람(andros)과 형상(eid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휴머노이드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 영어(human)와 그리스어의 합성어다.



콜로디의 동화는 또한 도입부에서부터 ‘조물주와 피조물의 묘한 관계’를 보여준다. 조물주는 “춤도 추고 칼싸움도 하고 재주넘기도 하는” 곧 출중한 능력을 지닌 피조물을 원한다. 조물주는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피조물은 완성되자마자 말썽을 부린다. 그것도 조물주를 세게 도발한다. 발로 코끝을 차다니! 피조물은 조물주의 가르침으로 한발 한발 배움의 길에 나선다. 하지만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면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다가 사고를 칠 수도 있다. 조물주는 피조물을 통제하기 어렵게 된다. 신중하게 실천했어야 할 자신의 창조 행위를 후회한다. “미리 깨달았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는걸!”



이렇듯 콜로디의 작품을 창조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창조자의 한계, 피조물이 발휘하는 능력의 역설, 인간을 닮아가는 피조물의 의미 등을 포착할 수 있다. 피노키오의 이야기는 21세기의 매우 중요한 과학적 철학적 과제와 깊이 연관 있어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로봇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로봇(robot)이라는 말은 노동 또는 노역을 의미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유래한다. 이 명칭은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1920년)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작품은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는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차페크의 작품도 로봇공학의 발전과 로봇 상용화에 따른 현상과 문제점들을 세세히 예상하고 있다. 이야기는 극단적 결말에 이른다. “창조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모든 노동을 대신하던 로봇이 고통과 분노에 관한 “감수성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서, “인간이 자신들의 기생충”임을 선언하고 인간을 멸종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감성을 지닌 로봇 가운데서 남녀 한쌍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해갈 가능성의 문을 희망적으로 열어놓는다.



지난 100여년 동안 로봇에 관한 작품들은 대부분 비극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년 동안 담론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로봇이란 말이 쏙 들어가고 인공지능이 논란과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챗지피티를 비롯한 인공지능 활용은 인형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대부분 형상은 없고 지능의 역할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닮은 로봇은 때로 거리감, 불안감, 위압감 등을 줄 수 있지만, 보이지 않고 매체로서 작동하는 지능은 우리 일상에 훨씬 더 친근하게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물리적 인공지능’의 과제가 부상하면서 로봇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로봇의 개념은 인공지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물리적이든 지능적이든 ‘탁월한 능력의 인형’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술적 특이점도 로봇의 영역에서 올지 모른다. 신체적 역량이든 지적 능력이든 피조물이 조물주를 추월하는 시점에 대한 담론은 그 시점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항상 근원적인 차원을 건드린다. 모든 창조 행위에는 조물주의 통제를 벗어나는 묘한 자유의 영역이 있다. 이는 조물주 신화를 담고 있는 종교의 창세기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의 명령을 거역한 최초 인간의 자유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인간이라는 창조자가 아무 문제 없이 자신의 피조물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건 희망 사항이다. 인간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는 문제를 선제적으로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사유한다는 뜻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기대할 만한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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