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적
'-적'(的)은 영어의 '-tic'에 해당한다. 'romantic'은 '낭만적', 'systematic'은 '체계적', 썩 잘 들어맞는다. '-적' 자체는 괜찮지만 남발되고 오용되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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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곤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 -적
'-적'(的)은 영어의 '-tic'에 해당한다. 'romantic'은 '낭만적', 'systematic'은 '체계적', 썩 잘 들어맞는다. '-적' 자체는 괜찮지만 남발되고 오용되는 것이 문제다.
"기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마음적으로는 아직 좋아하신다 그거죠?", "협조적으로 생각해주세요" 따위는 어색하고 이상하다.
홈쇼핑 방송에서 나오는 "오늘 가격적으로 유리한 상품이 많아요", "품질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등도 '-적'의 본래 용도를 벗어난 것이다. '-적' 앞에는 한자어 명사가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적'을 떼어내도 뜻이 통하면 '-적'을 붙이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실질적'은 오롯하지만, '실제적'은 '실제', '실제로', '실지'면 충분하다. '참고적', '직접적', '즉각적'도 '참고로', '직접', '즉각'이면 족하다.
◇ 패스트트랙에 태운다고?
패스트트랙(fast track)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빠르고 직접적인 경로'를 뜻하지만, 보도 용어로는 국회에서 발의된 안건의 신속 처리를 위한 제도라는 뜻을 갖는다.
문제는 그 활용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태우는' 대상이고 나머지 사물, 물건은 '싣는' 것이다. 물론 그 심정,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안건을 싣는다'고 하자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나 명절 때만 되면 귀성객을 그렇게 실어 나른다고 하더니, 이제 와선 왜 그깟 종잇조각을 태운다고 부산 떨며 난데없는 의인화에 더해 존대에 나서는가.
정리하면 '태우다'는 틀리고 '싣다'는 어색한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하다'가 여러모로 합리적이다.
참고로 '몸을 실어(싣다)'는 시적(詩的) 표현으로 봐야 한다.
◇ 파이팅?
'파이팅/화이팅'은 방송에서 일부 몰지각한 진행자가 퍼뜨린 일본식 조어다. 복싱에서 양 선수가 공격 의지 없이 소극적으로 임할 때 심판이 '파이트'(fight)라고 하는데 여기에다 난데없이 명사형 어미 '-ing'를 덧대어 '힘내라', '잘해라' 등의 쓰임으로 바꾼 것이다.
대표적인 '쟁글리시'(Janglish), 즉 일본식 영어다. 1980∼90년대에 방송사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 방송을 베끼던 시절이 있었다. '파이팅'은 그 물결을 타고 전가의 보도처럼 많이 쓰이게 됐고, 일반인들에게도 삽시간에 퍼졌다.
더 고약한 것은 정작 일본은 오래전 '화이또'(ファイト)로 회귀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당히 콩글리시의 대표 격으로 대접해야 하는 걸까?
2021년 10월 런던발 기사가 흥미로웠다. 한류 관련 20여 개 단어가 옥스퍼드에 새로 등재됐는데 한국식 영어 표현으로 '스킨십'과 '파이팅', 두 개가 포함된 것이다. 이로써 파이팅은 일종의 면죄부를 얻게 된 셈.
그러나 파이팅의 조야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파이팅 코리아'는 외려 촌스럽게 들린다. 이제는 단연 '힘내라 대한민국'이 대세다. 고무적이지 않은가.
파이팅 대신에 '아자', '으라차차', '아리아리' 등 다양한 고유어 표현이 빠르게 힘을 얻고 있다.
◇ 삑사리?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너무 많이 나온다. 일상에서도 젊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두루 쓰는 것 같다. 일본말 같긴 한데 일본어 사전에서 찾기 쉽지 않다. '삑'은 우리도 의성어로 쓰니까 괜찮은 것 같고, 어감도 꽤 재밌고, 대체어도 마땅치 않고….
이런 여러 이유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듯하다.
'삑사리'는 한마디로 아주 고약한 말이다. 일본말을 우리나라에서 다시 조합해 만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단어다. '삑'부터가 우리의 '삑'이 아니라 일본어에서 경적을 나타내는 'ぴ いっ'[삣]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다 위치, 정도, 가치, 값 등이 내려가거나 낮아지는 명사 사가리/상아리(さがり)/下(がり)를 붙이되 중간의 발음 요소인 '가/ 아'가 빠지면서 형성된 말이다.
정리하면, '삑 소리를 내며 본래의 것에서 낮게 이탈한 것'이라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써서 어느 정도 보편성을 획득한 단어라도 일본말을 우리말처럼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삑사리를 당구에선 '헛치기', 노래라면 '음 이탈'로 표현을 바꿔 보자. 일상에서 어떤 일이 예상과 달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도 '삑사리'를 쓰곤 하는데 옳지 않다.
이럴 땐 '일이 어긋난다', '상황이 꼬인다', '돌발 변수가 생기다' 등이 대안이다.
◇ 십팔번?
노래방의 이름과 분위기가 어느새 아득해지고 있다. 누군가 "넌, '십팔번'이 뭐야?" 하면 "그게 일본 말이래. 애창곡으로 해야 한다지?"라고 말할 정도로 십팔번은 많이 위축됐다.
그런데도 '십팔번'이 여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소심한 폭발음 속에서 스멀대는 '유사(類似) 욕지거리 분출'이라는 카타르시스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십팔번'을 '애창곡'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 그다지 깔끔한 순화는 아니다. 그러나 많이 정착됐고, 이게 제일 낫다. 일본말 '주하치반 十八番'(じゅうはちばん)은 원래 유명한 가부키 가문의 '교겐'(狂言) 중 크게 히트한 열여덟 가지 목록에 붙인 이름이다. 교겐은 '짧고 우스운 이야기'를 말한다.
'18가지 교겐 목록'이라는 두루마리 종이는, 그래서 비싼 상자에 소중히 보관해온 전통이 있었다. 이걸 꺼낸다는 건 꽤 드문 일이었고, 그 두루마리 종이는 꼭 필요할 때만 선보였다.
십팔번은 그러니까, '아주 귀한 기회', '결정적 순간'이 원래 의미다. 18이란 숫자는 클래식 쪽에도 우뚝하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狂詩曲·랩소디) 중 제18 변주'라는 곡이 있다.
소박하게 시작하다가 낭만적으로 바뀌며 장중하게 끝난다. 3분 안팎이지만 유려한 선율미 덕에 영화, 광고 등에 숱하게 쓰였다. 그러고 보니 교겐(광언<狂言>)은 광시(狂詩)와도 통할 법하다. 18의 마법 같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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