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티베트를 가다]①'서쪽의 보물창고'는 어떻게 中의 일부가 됐나

속보
韓 "서해 中 구조물 깊은 우려 전달"…中 "순수 양식 목적, 영유권과 무관"

1951년 중국에 무력으로 합병…1959년 대규모 독립운동 실패

이후에도 독립 시위 지속…中, 경제성장 지원하며 문화 이식



[편집자주] 달라이 라마, 세계의 지붕, 독립운동과 억압의 역사, 중국 내 인권 논란의 핵심 등 티베트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많다. 외국 언론이 현지를 직접 취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27일부터 4월 1일까지 영국 로이터통신, 미국 CNN 및 NBC, 일본 교도통신·지지통신 등 10여개 외신 및 중화권 매체를 대상으로 티베트 현지 취재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뉴스1>이 참가해 '신의 땅'으로 불리는 라싸와 린쯔를 다녀왔다. 중국 당국이 보여주는 것만 취재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한 출장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행간'을 읽으려 노력했다. 며칠에 걸쳐 티베트 취재 내용을 전한다.

뉴스1

시짱(티베트) 자치구 성도 라싸 포탈라궁에서 바라본 라싸시 전경. 2025.3.28/뉴스1 ⓒ News1 정은지 특파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티베트=뉴스1) 정은지 특파원 =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시짱(西藏) 자치구는 '서쪽의 보물창고'라는 뜻이다. 국제사회에서는 '티베트(Tibet)'로 통용된다. 광활한 대지를 자랑하는 티베트는 독특한 문화와 유산을 간직해 신들의 언덕이라고도 불린다.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우라늄, 구리, 석유 등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과 티베트와의 역사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 초 송첸캄포가 처음으로 티베트 지역을 통일한 후 토번제국을 세웠는데, 토번국의 중심지가 오늘날의 시짱 자치구 성도 라싸다. 당시 토번의 위세에 밀린 당나라는 당 태종의 딸 문성공주를 송첸캄포 부인으로 바쳤다.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시집을 가면서 중국 문화가 티베트에, 중국에는 티베트 불교가 각각 전해졌다.

티베트는 9세기 중반 불교 탄압 등에 따른 갈등과 내분으로 수백년간 혼란이 지속됐고, 토번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이로 인해 13세기에는 몽고족의 지배를 받으며 원나라에 복속됐고 이후 명·청 시기에는 티베트 불교 지배자가 자치권을 유지하며 성장해왔다.

뉴스1

시짱(티베트) 자치구 성도 라싸에서 진행된 공연 <문성공주> 일부. 2025.3.29/뉴스1 ⓒ News1 정은지 특파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은 티베트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로 원나라 때부터 중앙 정부가 티베트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티베트는 혼란을 틈타 독립을 선언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본토를 장악하면서 1950년 티베트로 진격했고 이때 달라이 라마 14세는 티베트 남부로 피신한다.

1951년 5월 티베트 대표단은 베이징에서 중국과의 '17개조 협약'을 체결하고 중국에 합병됐다. 중국은 이 협약 체결을 '평화해방'이라 평가한다. 해당 협약에는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지만 종교와 자치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으나, 결국 이같은 자치권은 무시됐다. 공산당이 티베트로 진입했을 당시 미국, 영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한국전쟁에 집중했는데, 이로 인해 티베트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어 1959년 3월 10일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들의 반중국 봉기가 발생했다. 중국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 약 2주간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수많은 티베트인이 목숨을 잃었고,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다. 티베트 망명정부 등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들은 3월 10일을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로 매년 기리고 있다.


3월 28일 당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으며 중국은 이날을 '시짱 100만 농노 해방 기념일'로 규정한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분리주의 운동'으로 비판한다.

이어 1965년 9월 1일엔 시짱 제1차 인민대표대회가 라싸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시짱 자치구가 설립됐다.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 중 가장 늦게 자치구가 설립된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덩샤오핑이 티베트 문제와 관련 "독립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라도 논의할 수 있다"고 언급해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와 협상의 뜻을 내비쳤고, 망명정부가 대표단을 티베트에 파견해 협상을 진행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망명정부가 이를 거절하며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에도 티베트 내에선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1987년 9월 달라이 라마의 방미 기간 라싸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라싸에선 17개월간 18차례의 시위와 소요 사태가 이어졌고 중국 당국은 1989년 3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다. 이 진압을 지휘한 것이 당시 시짱 당서기를 지냈던 후진타오 전 주석이다.

이후 중국은 이 지역에 경제적 지원을 강화하는 당근책을 부여하고 적극적인 유화책을 전개한다. 우선 1994년 중앙은 제3차 시짱 공작좌담회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장기적 지원을 위한 '맞춤형 지원, 구역별 책임, 정기적 인사 순환'을 골자로 하는 지원책을 내놓는다. 이 기간 중국 정부는 수백 개의 티베트 개발 프로젝트를 수립했고, 2006년엔 라싸를 잇는 '칭짱철도'가 개통해 한족과 짱족(티베트족) 간 간극을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 2008년 대규모 유혈시위가 한차례 더 벌어졌었다.

제13차 5개년 계획(2016~2020년) 기간엔 17개 성·시가 총 1260개의 티베트 지원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이 기간 투자액은 200억위안으로 집계됐다.

그 결과 1994년부터 2022년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1만1900명의 간부들이 이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거나 산업 육성 업무를 통해 시짱 자체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또한 2019년 말엔 약 62만 8000명이 '탈빈곤'했다.

최근 10년간의 시짱 GDP 성장률을 보면, 2014~2017년엔 매년 10%가 넘는 두자릿수의 성장률을 보였다. 2023년의 성장률은 9.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 주도의 티베트 흡수 정책에 따라 티베트 고유의 언어, 문화, 전통 등이 소멸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방을 중심으로 중국이 티베트 아동을 강제로 동화시켰다는 주장도 지속 제기되고 있다. 이로 인해 티베트 인권 문제가 미중 갈등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뉴스1

시짱(티베트) 자치구 라싸 공항 광장에 설치된 중국 사회주의 가치관을 소개하는 조형물. ⓒ News1 정은지 특파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jjung@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