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진 no. 108
여기 한 여성과 아이의 사진이 있습니다. 웃지 못하고 멍하거나 힘든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안중근 의사의 동생 가족 입니다. 안중근 선생은 그의 나이 29살이던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총을 쏘아 사살하고 이듬해 사형당했습니다. 안 의사의 희생은 역사책 뿐 아니라 소설과 영화로 우리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안 의사의 죽음 이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남아 있던 가족들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오늘 소개하는 기사는 1925년 4월 10일과 4월 13일 이틀에 걸쳐 실린 “안중근의 계수(季嫂) 최씨 부인의 애화”입니다. 계수는 남자 형제 사이에서 동생의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가 여러 명일 경우 막내의 부인을 이르는 말입니다. ‘애화(哀話)’라는 부제처럼,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은 박해와 빈곤, 사회적 냉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의로움이 당시 남아 있던 친척들에게는 오히려 낙인이 되고 고난의 이유가 되었던 현실이 강조됩니다. 다만 피붙이보다 김원식이라는 무명의 청년과 아이의 담임 선생님의 인류애가 그나마 아직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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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최씨 부인.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6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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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오늘 소개하는 기사는 1925년 4월 10일과 4월 13일 이틀에 걸쳐 실린 “안중근의 계수(季嫂) 최씨 부인의 애화”입니다. 계수는 남자 형제 사이에서 동생의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가 여러 명일 경우 막내의 부인을 이르는 말입니다. ‘애화(哀話)’라는 부제처럼,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은 박해와 빈곤, 사회적 냉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의로움이 당시 남아 있던 친척들에게는 오히려 낙인이 되고 고난의 이유가 되었던 현실이 강조됩니다. 다만 피붙이보다 김원식이라는 무명의 청년과 아이의 담임 선생님의 인류애가 그나마 아직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1부 요약: “정처 없이 떠나 자유로운 땅을 찾아”
안중근의 셋째 동생 봉근은 큰형 안중근의 사형과 둘째 형 명근의 옥살이에 절망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고향 해주에 두고 망명을 결심.
부인 최씨는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음.
점점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형제 집에서 구박을 받고, 옹기장사, 유기장사, 행상 등 온갖 일을 해가며 자식들을 키움.
안중근의 셋째 동생 봉근은 큰형 안중근의 사형과 둘째 형 명근의 옥살이에 절망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고향 해주에 두고 망명을 결심.
부인 최씨는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음.
점점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형제 집에서 구박을 받고, 옹기장사, 유기장사, 행상 등 온갖 일을 해가며 자식들을 키움.
맏아들 창익은 학교 졸업 후 재판소와 도청에서 일했으나, ‘안중근 조카’라는 이유로 해고됨. 이후 체신리원 양성소에 합격하여 상경.
● 2부 요약: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개에 떨어지는 눈물”
창익이 상경한 뒤 남은 가족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짐.
둘째 아들 창준은 굶주림으로 학교에서 졸도, 급우들과 교사들이 도움을 줌.
해주 식당에서 일하는 김원식 청년이 매달 25원씩 후원, 가족의 유일한 생계줄이 됨.
그러나 친정 식구들의 냉대, 동생마저 형제를 외면하고, 개가를 권유받는 등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이어짐.
남편을 찾아 상해로 떠날 결심을 품음.
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
● 1부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 자유로운 땅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
북만주 하얼빈역에서 한번 울린 피스톨의 음향과 함께 교수대 위에서 원한의 눈물을 뿌리고 한 방울 이슬이 된 안중근(安重根)은 4형제인데, 셋째 동생인 봉근(奉根)씨는 큰 형님의 원한 깊은 죽음과 둘째 형님 명근씨의 5년 간의 철창 생활 모든 것이 가슴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근씨는 모든 불합리한 비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자유가 없는 땅을 벗어나자는 유지대로 『민족을 위하여』라는 굳은 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최씨 부인(30세)과 당시 5세부터 한 살 된 아들까지 삼형제를 쪽박에 밤 쏟듯이 남겨 두고 정처없는 발길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봉근 씨가 임금 같이 붉고 통통한 어린 뺨 위에 주먹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석별의 애타는 키스를 어린 이마에 던진 후에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부인과 다시 성공하는 날을 굳게 언약하고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도 다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고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게에 떨어지는 눈물
봉근씨를 떠나 보낸 최씨 부인은 굳은 의지를 가진 이로 남편과 같이 즐기던 고향 해주(海州) 땅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으로 어린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짤막짤막하게 전하는 소식을 더 없는 낙으로 삼으며 2,3년간은 두고 간 재산으로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날이 가고 밤이 가면서 청춘에 끝없는 정서를 풀 곳이 없고 오직 가을 하늘에 짝 잃은 외로운 기러기 날아올 때 청량한 가을 달이 뒷창으로 근심과 초조와 고독과 번민에 찌들어 파리한 그의 얼굴을 비출 때 그는 세상에 고락을 모르는 어린 세 생명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로운 베게머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며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들이 작문을 지을 때 아버지를 그리는 글을 지어 가지고 어머니 앞에서 읽을 때 그의 가슴이 메여 터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나날이 느는 재주에 가슴에 막히는 설움이 위로를 받았답니다.
◇ 행상을 떠나 옹기 장사가 되어
그러나 이 불행한 최씨 부인에게는 또 다시 쓴(苦) 운명의 신이 농락의 손을 그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직없이 없어 수입이 없이 소비만으로 3년이나 쓰고 나니 호구할 방책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할 수 없이 떠날 때 부탁하여 둔 친정되는 해주 서영정에 있는 오라버니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오라버니는 상당하 재산가로서 불상한 누이 한 사람을 거두지 못할 경우는 아니었으나 세상의 인심은 물욕과 함께 어두어져서 오히려 그 여섯 식구가 그에게는 눈에 가시같기도 하였답니다. 자활(自活)의 정신이 많은 최씨 부인은 그곳에 있음이 심히 괴로웠으나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찬밥 덩이라도 한 숟가락씩 먹여 보내기 위하여 모든 굴욕을 무릅쓰고 그 집에 있으면 낮에는 옹기장사 유기장사를 하노라고 연약한 몸에 주린 배를 졸라 매고 동으로 서로 행상하러 다녔답니다. 이리하여 겨우 끼니는 이었으나 그 역시 살 길이 망연하였으므로 눈물을 머금고라도 친가에 기식(寄食)하는 설움을 당치 아니치 못하게 되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안팎 일을 모조리 보아 주었답니다.
◇안씨 조카라고 간 데마다 내쫓겨
이렇게 지내는 중에 맏아들 창익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어머니의 정경을 살펴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는 재판소에 급사(給使) 노릇을 하며 밤에는 혼자 책을 읽어 수양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은 재판소에서는 안중근의 조카라는 혐의로 해고를 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에 또 도청에 들어갔었지만 다시 나오게 되어 창익은 이를 갈고 쓴 눈물을 뿌리며 할 수 없이 손을 맞잡고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최씨는 그래도 어린 목숨을 위하여 친정에서 쌀을 구걸하였으나 두세 번에 응치 않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호미(胡米)를 주며 다시 오지 못하게 하였음으로 최씨는 이런 창피하고 쓰린 경우를 당함이 한번뿐이 아니었으므로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비분이 세상에 부모동기의 무정을 원망하고 얻은 호미를 내던진 때도 있었답니다.
그 동안 창익은 다행히 경성체신리원 양성소(京城遞信吏員養成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어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면서 창익은 일년 후에는 이 괴로움이 적어지리라는 것을 굳게굳게 예약하였답니다.
● 2부 (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 어린 아들 창준이가 배고파서 넘어져
이와 같이 창익이가 하루 아침에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간 뒤에 그들의 생활은 더 참담하였습니다. 그 고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은 물론이지마는 더욱이 물질상으로 심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최씨 부인은 남의 빨래를 빨고 또는 남의 집 곁방 살이를 하여가며 아침저녁으로 연명이나 하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아들들을 공부시키기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경에 있는 최씨 부인에게는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액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떤 하루 날 창준(昌俊)이가 학교에서 우연히 졸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심한 공복증(空腹症)으로 그윽한 정신에 피로로 인함이었었는데 이와 같이 졸도하매 같은 반 동무 아이들이 이왕부터 마음착하고 공부잘하며 우의가 있는 창준이가 가세가 곤란하여 굶고 다니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이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이 어린 창준이를 구하기 위하여 단돈 몇 십 전씩을 거두기로 하여 붉은 맘에 참된 동정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의 진실된 행동에 그 반 담임 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후부터 자기의 박봉을 뜯어서 어린 창준이의 학비를 돕기로 하였습니다.
◇ 김군의 동정 - 매달 25원씩 보조
이 참상을 들은 해주 식당에 숙수로 있는 김원식(金元植)(20)군은 곧 자혜의원으로 인도하여 치료케 한 결과 곧 다시 소생케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어머니 되는 최씨 부인의 맘이야 어떠하였으리오. 졸도하여 죽어 넘어진 아들은 앞에 있으되 돈 한 푼 없어 자기는 꼼짝할 힘이 없고 당장 창준이가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는 자기의 친정 아버지가 있으되 그 아들과 며느리의 질투가 무서움인지 어떠냐는 말 한마디 커녕 약 한봉지 값도 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성마리아 앞에서 자기 누이의 장래를 약속하던 소위 지사인 최씨 부인의 오라버니 되는 이는 고개 한 번 기웃하지 않음을 볼 때에 이 금전으로서만 행사하며 돈! 이것만을 아는 자기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이보다 이 더러웁고 추악한 세태를 한없이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에 친분도 없는, 앞에서 말한 김원식 군이 매달 25원이라는 돈으로 가계를 보태어 줌으로 그 식구에게는 한 줄기의 살 길이 비추었습니다.
◇ 없는 자의 설움 - 형제가 남만 못해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어느 덧 여름이었습니다. 어떤 여학교에서 교수하는 자기의 동생이 오라버니의 집에 돌아와서도 한 고개 넘어 살고 있는 형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최씨 아들과 오라버니 아들을 길에서 한꺼번에 만나도 최씨 아들은 본 체도 않고 오라비의 아들은 쓰다듬어 만지고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다는 어린 아들 창준의 서러운 사정의 하소연을 들을 때 누구나 다르랴 그의 맘에는 한낱 자식을 사랑하는 맘에 분개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으나 오직 쓰린 운명 만을 한탄하였을 뿐입니다. 여름 동안에 친정에 와 있을 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으러 거기로 들어가려하면 문까지 거는 일이 있었답니다. 이 뿐 아니라 그의 친정에서는 개가(改嫁)하라고 자못 성가시게 굴었답니다.
◇ 남편 찾아 상해로 곧 떠날 터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의 은인이라 할만한 김군의 도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시키고 지났습니다. 그 기나긴 동안에 한번 간 그의 남편은 소식조차 망연하여 생사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상해(上海)에서 해주 사람이 그가 기다리는 남편 봉근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자기의 가족을 자기 처남에게 맡기었으므로 아주 안심하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는 최씨 부인의 맘은 더 미여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들 창익이도 상해로 건너간 소식을 들은 최씨 부인은 어린 아들 3형제와 딸 창수(昌壽)를 데리고 좀 더 자유로운 지대로 가서 혹이나 남편을 만날까하는 생각으로 김군과 함께 상해로 며칠 후에 떠날 터이라는데 그 어린 남매들은 수양산 머리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빨리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끝)
● 추억과 기억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지난 3월 26일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는 안 의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현장을 취재차 다녀왔습니다. 의식있는 일본인들까지 내한해 참석한 추모식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게 한 고인의 숭고한 뜻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행사가 열리고 어떤 언론들은 그 행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시대 당시에는 유족들이 주변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냉대 속에 외롭게 살았다는 것을 100년 전 기사와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정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1925년에 언론이 안 의사의 남겨진 친척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기사에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안중근의 동생 이름은 안정근(1885-1949. 건국훈장 독립장)과 안공근(1889~ 사망연도 미상. 건국훈장 독립장)입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안봉근과 안명근(1879~1927. 건국훈장 독립장)은 안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진은 안 의사의 사촌 계수씨와 오촌 조카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사촌지간이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신문에서 그들을 형제라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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