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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시리' 앞에서 우왕좌왕: 혁신 아이콘 애플의 굴욕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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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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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 업데이트를 연기한 애플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오고 있다.[사진 | 연합뉴스]


# 딱 한마디만 건네면 인공지능(AI)이 알아서 문서를 작성해 이메일을 보낸다. 어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을 골라 보정해 SNS에 올려주기도 한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카메라로 찍으면 누군지 파악해 이름과 정보를 알려준다.

# 지난해 애플이 공개한 아이폰의 기능들이다. 수많은 소비자는 "추후 업데이트를 통해 적용하겠다"는 애플의 말을 믿고 아이폰16을 구매했다. 그렇게 팔려나간 수량만 3720만대에 이른다.

# 그런데 애플은 이런 소비자의 기대를 저버렸다. 예고했던 업데이트를 돌연 내년으로 미뤘다. 미 소비자들이 집단소송까지 제기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만, 애플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출시를 미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혁신의 상징'이던 애플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행보다.

# 이런 상황은 경쟁사인 삼성전자엔 절호의 기회다. 한발 앞서 AI 서비스를 선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애플의 속내도 살펴야 한다. 애플이 AI 서비스를 못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다. 그만큼 애플 AI 서비스엔 숱한 변수가 깔려 있다. 애플은 왜 AI 서비스의 출시를 연신 미루고 있는 걸까. 더스쿠프가 애플의 '알 수 없는 속내'를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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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지난해부터 계속해서 애플 인텔리전스의 새 기능들을 강조해 왔다.[사진 | 애플 제공]


애플은 고집스럽게 완벽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제품·서비스 완성도가 기대치를 밑돌면 짧게는 수개월부터 길게는 1년이 넘도록 출시를 연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스티브 잡스 시절부터 이어져온 일종의 헤리티지다. 하지만 이번에 애플이 업데이트를 미룬 음성비서 기술은 경우가 좀 다르다. 애플이 완성은커녕 개발마저 끝내지 못한 것 같다는 추측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온다. 왜일까.

"애플 AI는 핵심기능이 빠진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민단체 '서울YMCA 시민중계실'이 지난 3일 보도자료에서 애플의 AI 서비스 '애플 인텔리전스'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단체는 애플이 자사 스마트폰 '아이폰16' 광고에 아직 구현하지 않은 애플 인텔리전스의 기능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꼬집었다. 이를 이유로 3월 24일 애플을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에 신고했고, 공정위는 이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

국내에서만 논란이 불거진 건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새너제이 지방법원에도 3월 19일(현지시간) 애플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이 제기됐다. 원고 측인 미국 로펌 클락슨(Clarkson)은 소송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이폰 광고는 혁신적인 기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애플의 주장과 달리 애플 인텔리전스는 실용성 면에서 상당히 제한적이거나 일부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애플 인텔리전스에 어떤 문제가 있길래 이러는 걸까. 이 서비스를 처음 공개한 지난해 6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애플은 '세계 개발자 회의(WWDC)'에서 애플 인텔리전스의 기능을 소개하면서 "아이폰과 애플워치(스마트워치), 맥(컴퓨터) 등 모든 기기에 애플 인텔리전스를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기능은 'AI 에이전트'였다. AI가 사용자를 대신해 여러 앱을 조작해 인간의 개입 없이도 명령을 수행하는 게 이 기능의 핵심이다. 가령, "방금 찍은 사진을 예쁘게 보정해서 블로그에 올려줘"라고 말하면 AI가 사진 편집앱과 블로그앱에 접속해 알아서 진행한다. 애플이 공개한 영상에선 회사 서류를 작성할 때 AI가 사진첩에서 운전면허증 사진을 찾아 대신 입력해주는 장면이 나왔다.

애플은 아이폰16 출시를 앞둔 그해 9월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AI 에이전트 기능을 재차 홍보했지만, 아이폰16 구매자들이 당장 이 기능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애플은 "추후 시리(애플의 음성 비서 서비스) 업데이트를 통해 선보일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약속은 한낱 공염불에 그쳤다. 애플은 올해 3월 7일 성명을 통해 "더욱 개인화된 시리 출시를 연기한다"면서 "좀 더 완벽한 AI 에이전트 기능을 구현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지난해 9월 해당 기능을 소개한 유튜브 홍보 영상도 조용히 삭제했다.

문제는 업데이트 시점이 늦어도 너무 늦다는 점이다. 애플은 정확한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시리 업데이트는 2026년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만 남겼다. 아이폰 이용자는 기약 없이 최소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AI 에이전트에 매료돼 아이폰을 구입한 소비자 입장에선 '애플에 사기당했다'는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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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지난해 AI 기능을 홍보했던 유튜브 영상을 조용히 삭제했다.[사진 | 애플광고 캡처]


업계에선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고된 결과'로 보고 있다. 애플이 AI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듯한 신호들이 지난해 초부터 외부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2024년 2월 10년간 공들여 온 자율주행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팀원 2000명을 AI 부서로 이전한 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3월 21일엔 2018년부터 AI 부문을 맡아온 존 지아난드레아 수석부사장도 해임했다. 애플 인텔리전스 개발이 계속 지연돼 팀쿡 애플 CEO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럼 애플이 AI 에이전트 공개를 미루는 이유는 뭘까. 많은 전문가는 애플이 기술적 장벽을 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찬우 고려대학원(인공지능학)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AI가 여러 앱을 연동해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상호작용과 자연어 처리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숱하다. 당연히 구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아직 어떤 기업도 이런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AI를 내놓지 못했다."

AI 에이전트를 구현하는 게 왜 어려운지 좀 더 쉽게 풀어보자. AI가 여러 앱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각각의 앱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를 AI가 꿰뚫고 있어야 한다.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어떻게 데이터를 주고받는지, 사용자의 동의를 어디까지 받아야 하는지 등 AI가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현재 기술력으론 쉽지 않은 문제다.

AI 에이전트의 난제는 또 있다. 앱을 조작하기에 앞서 AI가 사용자의 명령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사용자가 "어젯밤에 친구랑 찍은 사진 중에 잘 나온 걸 하나 뽑아서 SNS에 올려줘"라고 AI에 명령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AI는 '잘 나온 사진'의 기준을 해상도가 좋은 사진으로 정해야 할지, 아니면 사용자가 예쁘게 나온 사진으로 잡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술이 부족하면 AI가 사용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AI 에이전트를 현실화하려면 AI 자체의 '자연어 처리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문제는 애플 인텔리전스의 능력이 기대치를 밑돈다는 점이다. 간단한 명령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영국 IT매체 테크레이더는 3월 22일 기사에서 "아이폰 사용자 경험의 핵심이 돼야 할 시리의 지능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부족하다"면서 "'이번 달은 몇월인가'란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이 소비자 입장에선 모욕적으로 느껴질 정도"라며 날카롭게 꼬집었다.

미 블룸버그 역시 지난 3월 3일 기사에서 "진정으로 현대화된 대화형 시리를 출시하려면 2026년이 아니라 2027년쯤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란 얘기가 애플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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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애플 제공]


애플은 지금까지 매번 혁신적인 기능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해 왔다. 하지만 시장 트렌드가 AI로 바뀐 뒤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핵심 기능을 빼놓은 채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의 불만이 치솟고 있지만, 애플은 아직까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서비스가 불완전해서인지, 아니면 서비스 수준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서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애플과 마찬가지로 AI 스마트폰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삼성전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애플의 AI 미스터리' 2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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