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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대신 마대 뒤에 색을 칠했다... 90세 단색화 거장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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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대신 마대 뒤에 색을 칠했다... 90세 단색화 거장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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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대가' 하종현, 2곳서 동시 전시
아트선재센터, 접합 초기작 등 실험성
국제갤러리, 최신작 위주 작품성 강조
하종현 화백. 국제갤러리 제공

하종현 화백. 국제갤러리 제공


1974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전업 작가가 된 화가는 캔버스 대신 마대(麻袋·굵고 거친 삼실로 짠 큰 자루)를 꺼내들었다. 그림을 그리려고 보니 굵은 올 사이의 구멍이 문제였다. 그때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마대 천 뒷면에 물감을 칠한 뒤 앞으로 밀어보자". 두터운 물감이 올이 성긴 마대 틈을 지나 앞면까지 튀어나오며 질감이 독특한 그림이 완성됐다. 화가 하종현(90)의 독창적인 기법인 '배압법(背押法·천 뒤에서 물감을 밀어올리는 기법)' 탄생 스토리다. 이 배압법을 다양하게 변주한 '접합(Conjunction)' 연작은 그에게 '단색화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선물했다.

그림은 앞면에? 고정관념 탈피한 그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5975'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5975'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현대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 하종현의 '접합'의 전후를 볼 수 있는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하종현 5975'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젊은 하종현의 작품을 조명한다. 전쟁과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등 한국 현대사의 변화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물질성과 재료를 실험한 과정부터 접합 연작 초기작까지 두루 살필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궁핍했던 시절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시대상을 직접 반영하는 재료와 직접 만든 도구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오랜기간 모은 신문 더미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같은 크기의 백지를 쌓아 올린 작품으로 엄혹한 시절 언론 통제를 비판했다. 두개골과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활용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마대 자루 역시 밀가루, 철조망 등과 함께 당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배압법을 고안한 이후 1970년대부터 선보인 접합 연작의 초기작도 나왔다. 아트선재센터 관계자는 "하종현의 작품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하종현의 1971년작 '대위'. 아트선재센터 제공

하종현의 1971년작 '대위'. 아트선재센터 제공


하종현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의 '하종현 5975' 전 개막을 앞두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전시된 작품은 1967년작 '도시계획백서 67'로, 캔버스 하단을 입체적으로 구부려 회화의 고정된 형식 탈피를 시도했다. 연합뉴스

하종현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의 '하종현 5975' 전 개막을 앞두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전시된 작품은 1967년작 '도시계획백서 67'로, 캔버스 하단을 입체적으로 구부려 회화의 고정된 형식 탈피를 시도했다. 연합뉴스


현대적인, 그러나 깊어진 작품세계

하종현의 'Conjunction 09-339'. 국제갤러리 제공

하종현의 'Conjunction 09-339'. 국제갤러리 제공


'하종현 5975'가 젊은 하종현의 실험성을 보여줬다면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마련한 전시 'Ha Chong-Hyun'은 최신작을 중심으로 작품성을 드러낸다. 반세기에 걸쳐 유화를 다뤄온 화가의 실험과 물성 탐구의 현재 좌표를 기록했다. 기존의 '접합' 연작에서 파생된 다양한 색상의 접합 시리즈, 자유분방함과 자연미를 강조한 최신 작품 등 30여 점이 등장했다.

두 전시장을 넘나들며 접합 연작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바뀌는 작풍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다. 신작인 'post(이후)-접합' 연작은 마대 천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이 앞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형태로 초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초기작에서 자연의 흙색을 사용한 것과 달리 신작에서는 색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해 점성 있는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부각시킨 점이 다르다.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기존 접합 연작에서 한국적인 무채색이 주로 사용됐다면 신작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연색을 가져와 보다 현대적으로 다가온다"며 "하종현의 화가로서의 여정은 재료의 물성 탐구를 통해 하나의 범주에 얽매이길 부단히 거부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아트선재센터 전시는 20일까지, 국제갤러리 전시는 다음 달 11일까지.
하종현의 '접합 24-52'. 국제갤러리 제공

하종현의 '접합 24-52'. 국제갤러리 제공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