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위패봉안실2’ 앞에 선 박경훈 작가. 허호준 기자 |
“제주4·3 군사재판 수형인은 물론 일반 재판 수형인까지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이뤄지고 있잖아요. 분명히 역사의 진전입니다. 그런데 뭔가 비어있는 구석이 있어요. 그 빈 부분이 결국 이름 없는 ‘4·3’을 만드는 배경이기도 하죠.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지난 9일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갤러리 포지션 민에서 만난 판화가 박경훈 작가가 제주(4월3일∼5월31일)와 서울(갤러리 나무아트, 4월2∼15일), 광주(오월미술관, 4월7일∼5월31일) 3곳에서 동시에 전시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4·3 목판화 초대 개인전 ‘백골난감-이름 잃은 항쟁에 바치는 때늦은 조사(弔辭)’는 지금도 이름을 찾지 못한 ‘4·3’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자, 여전히 해원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항쟁 주체세력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다. 작품은 전체 23점이다.
작가는 ‘애도의 차별’에 주목한다. 박 작가는 “4·3평화공원을 조성하면서 내건 4·3 해결의 정신은 화해와 상생”이라며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동시대의 희생자로 인정한다는 공감대에도 배제와 차별의 국가폭력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작품 ‘어떤 모자-역사 정의 실현 만세’ 앞에 선 박경훈 작가. 허호준 기자 |
“수년 동안 계속되는 재심 재판을 보면서 담에 걸린 것처럼 답답했어요. 무엇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나, 생각하다 보니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배제자들이 떠올랐지요. 그 후손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에게 4·3은 계속되는 것이지요. 판화가로서 이것을 새겨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백골’이 들어가 섬뜩할 것 같지만, 작품 속 백골들은 아련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있다.
2019년 1월17일, 제주4·3 수형 생존자들이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재심 무죄 선고가 이뤄지자 만세를 외쳤다. 그의 작품 ‘우리는 죄 없는 사람’ 속에는 만세를 외치는 수형 생존자들 사이에 언뜻언뜻 백골이 보인다. 어떤 백골은 고뇌에 찬 모습으로 두개골을 쥐고 있고, 어깨에 총을 둘러멘 어떤 백골은 ‘4·3 당시 수괴급 재심청구서’를 들고 무엇인가 외치고 있다. 백골이 된 그들은 4·3 희생자로 인정되지도 않았고, 재심 청구 대상도 아니다.
작품 ‘해후2’. |
헌법재판소는 2001년 보수 인사들과 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4·3특별법 위헌심판 청구 소송을 기각하면서 군경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자나 남로당 간부 등 항쟁 주도세력을 희생자로 볼 수 없다며 사실상 희생자에서 배제했다. 반면 가해 세력으로 분류되는 군경은 희생자 범위에 포함된다. 작품은 이에 대한 정면 항의인 셈이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위패봉안실2’라는 제목이 붙은 가로 2m가 넘는 대형 판화는 장엄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2009년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 있던 일부 위패가 우익세력들의 집요한 문제 제기로 철거됐다. 박 작가는 “10여명에 이르는 희생자 위패 철회가 유족들의 자진 철회 형식으로 이뤄졌다. 야박하기 그지없는 이념의 칼부림”이라며 “이미 백골이 된 망자들의 애도에도 배제와 차별이 존재한다”고 비판했다.
작품 ‘형제’. |
작품은 ‘애도의 차별’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던 당시 항쟁 주체세력의 아내는 손을 얼굴에 대고 고뇌에 찬 모습이다. 옆의 아들은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 시대 4·3의 현주소를 판화는 말한다. 배제와 차별을 당하는 이들에게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런 아련함이 곳곳에 남아있다. 백골이 된 남편과의 만남, 70여년 만에 유해가 돼 나타난 남편의 유해를 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작품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가끔 제주4·3평화공원에 가면 행방불명인 표석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가서 보면 표석 앞에 있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몇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착시현상처럼 그 비석 같은 표석 뒤에는 당시 죽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의 시선은 4·3 그때에만 머물지 않는다. 12·3 내란사태로 이어져 은박지로 전신을 감싸고 탄핵의 겨울을 보낸 키세스 시위대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하고, 트랙터로 상경한 농민과 시민들이 합세한 남태령 대첩에서는 130년 전 동학농민항쟁의 전사들이 함께한다.
작가가 전시회를 여는 의도는 작품 ‘백비를 세우다’에 있다. 작가는 “4·3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이름도 같이 죽었다. 항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사건’만 남았다”며 “정당한 항쟁으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말만 하면 안 된다. 자주 이야기하고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이 시대의 한계도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품을 찍어놓으면 그래도 흔적이라도 남으니까.” 작가의 말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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