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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도 5·18이 있었다... 광주 진실 알리려다 고문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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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도 5·18이 있었다... 광주 진실 알리려다 고문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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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 인터뷰
'대구의 5·18, 두레양서조합 사건' 출간
1980년 5월 14일 영남대 학생들이 전국에 내려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지 매일신문이 보도한 사진. 책과함께 제공

1980년 5월 14일 영남대 학생들이 전국에 내려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지 매일신문이 보도한 사진. 책과함께 제공


"1980년 5월 대구에도 5·18 광주 항쟁에 호응하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적 평가는커녕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는 이른바 '두레양서조합 사건'(두레 사건)에 대해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두레 사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대구에서 두레양서조합을 중심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나섰던 이들이 군부에 의해 탄압당한 일을 말한다. 두레 사건을 다룬 최초의 연구서 '대구의 5·18 두레양서조합 사건'을 최근 펴낸 김 교수를 전화로 만났다. 그는 "두레 사건은 1980년 5월의 항쟁이 광주만의 고립된 항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대구·경북 지역의 5월 운동"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지낸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책 '대구의 5·18 두레양서조합 사건'을 통해 1980년 대구에서 일어난 '두레양서조합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지낸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책 '대구의 5·18 두레양서조합 사건'을 통해 1980년 대구에서 일어난 '두레양서조합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다.


"민주화운동사에서 빠졌던 퍼즐 조각"


1980년 경북대 새내기였던 김 교수도 두레 사건을 2006년이 돼서야 처음 접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 사업을 할 때였다. 두레양서조합은 1970년대 유신 말기의 금서 조치에 대항해 양질의 사회과학도서 보급을 위해 대구에서 설립됐다. 두레양서조합이 운영하던 두레서점은 경북대 후문 앞에 있었다. 김 교수도 몇 차례 이 서점을 방문했다. "대학 새내기 때 만난 적 있는 선배들을 포함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 사건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놀랐죠." 그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 공적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사와 지역운동사에서 빠졌던 퍼즐 조각을 채우고자 한다"고 했다.

두레양서조합을 주축으로 경북대·영남대의 농촌문제연구회, 가톨릭농민회 소속 지역 사회운동가들은 1980년 5월 22일 광주로부터 '전두환의 살육 작전' 문건과 학살 참상을 알리는 테이프를 입수했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대구에서도 학생운동권과 연계한 연대 항쟁을 하기로 했다. 그해 5월 27일이 디데이. 대구 번화가인 동성로 네거리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 '대구 민주시민에게 알림' 5,000부를 뿌리기로 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광주를 전면 장악했다는 비보에 계획을 취소하고 유인물은 전부 불태웠다.
두레 사건 관련자들이 2024년 3월 2일 두레양서조합 제1대 이사장을 지냈던 이석태씨의 경북 포항 자택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상숙 교수 제공

두레 사건 관련자들이 2024년 3월 2일 두레양서조합 제1대 이사장을 지냈던 이석태씨의 경북 포항 자택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상숙 교수 제공


간첩단 조작으로 모진 고문·평생 후유증


같은 해 9월 11일, 사복 경찰들이 두레서점을 덮쳤다. 비상계엄 아래 숨죽이고 있던 학생들을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했다. '인혁당 잔존 세력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하려던 흉계를 꾸미던 군부는 일찌감치 두레서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100여 명이 고초를 겪었다. 이 중 14명은 보름 이상 혹독한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등을 당했다.

이들은 천주교의 구명 운동으로 간첩단 혐의는 벗었지만 후유증은 평생 갔다. 일부는 감옥살이를 했고,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10년 넘게 경찰의 감시와 사찰을 당했다. 김 교수는 "농민운동을 했던 피해 당사자들은 이후 뿔뿔이 고향으로 흩어져 10년 넘게 감시당하면서 서로 만나지도 못했다"며 "더구나 끝까지 행동하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국가폭력의 참혹함보다 커 당시 사건을 말하지도 못했다"고 전했다. 사건 발생 42년이 지난 2022년에서야 두레 사건으로 구속기소 됐던 당사자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두레 사건으로 고문 당하고 유죄 선고를 받아 일평생 빨갱이 낙인이 찍인 채 살았던 피해 당사자들이 2022년 5월 18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가족 등과 함께 법정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뉴스1

두레 사건으로 고문 당하고 유죄 선고를 받아 일평생 빨갱이 낙인이 찍인 채 살았던 피해 당사자들이 2022년 5월 18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가족 등과 함께 법정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뉴스1


두레 사건은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이들이 군부에 항거했던 정신은 기억해야 한다. 진상 규명도 필요하다. 김 교수는 "과거 청산 과정을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피해 배·보상, 화해의 역사화라는 단계로 볼 때 여전히 두레 사건의 지휘명령 체계 등이 밝혀지지 않았고, 고문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