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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파면 결정문에 담긴 '보통 한국인'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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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국가긴급권' 남용
헌재 "국민 큰 충격…더 이상 국정 못 맡겨"
반성 여부 따진 朴파면 결정서 더 나아가
노컷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지난해 12월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경내로 진입하려는 계엄군과 저지하려는 시민 및 국회 관계자들이 대치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우리나라 국민은 오랜 기간 국가긴급권의 남용에 희생당해 온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 그가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을 배반하고 전근대적 시대로의 퇴행을 꾀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담았다. 비상계엄이라는 국가긴급권의 발동이 우리 국민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고려치 않은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재판관들의 일치된 판단이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는지는 법 위반의 중대성과 함께 대통령 파면 여부를 가르는 한 축을 담당한다. 헌재는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대국민 호소용'이라고 둔갑한 것을 단호히 물리친 것을 넘어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적 맥락까지 드러냄으로써 파면을 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마지막 계엄 이후 45년 만에 또…국민 큰 충격"

노컷뉴스

연합뉴스



헌재는 윤 전 대통령 탄핵사건 결정문 79쪽에서 12·3 비상계엄이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살피며 첫 소주제를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 재현'으로 달았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쓴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는 1952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으킨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국회에 맞서 재집권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하에서 야당 의원 50여명을 연행하는 등 탄압 속에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됐고, 이 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며 장기집권을 시작했다.

이어서 헌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71.12.6.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서술했다. 1994년 헌재는 이 법이 "대통령 재량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국회에서 심의·확정한 예산안을 변경할 수 있는 등의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이라고 하면서 입헌주의 그 자체를 파괴할 위험이 있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다음으로는 1972.10.17. 박 전 대통령이 기존의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체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점을 기록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탄압하기 위해 선포된 비상계엄(1979.10.18.)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이후 정권 탈취를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1980.5.17.)도 뼈아픈 역사로 적시했다.


헌재는 "위 계엄 선포에는 모두 국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계엄포고가 수반됐다"고 지적했다. 유신헌법 아래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내용이 담긴 긴급조치가 9차례에 걸쳐 발동됐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긴급조치권은 1980.10.27. 제8차 개헌에서 '비상조치 권한'으로 대체됐고, 1987.10.29. 제9차 개헌에선 아예 폐지됐다. 헌재는 대통령 유고를 이유로 선포된 마지막 계엄이 1981년 해제됐고, 1993년 금융실명법 관련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포함하더라도 12·3 비상계엄 선포 전까지 국가긴급권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짚었다. 마지막 계엄은 43년 전 끝났고, 국가긴급권 행사도 31년 전으로 12·3 비상계엄 전까진 사실상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일이었다.

헌재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국민의 헌법수호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지면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였다"며 "헌재와 대법원 역시 과거 국가긴급권의 발동이 헌법에 위반됨을 확인함으로써 입헌민주주의를 공고히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해 "마지막 계엄이 선포된 때로부터 약 45년이 지나 또다시 정치적 목적으로 계엄을 선포해 국가긴급권을 남용했다"며 "이제는 더 이상 국가긴급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헌재는 특별히 우리 헌정사적 맥락에서 12·3 비상계엄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음을 꼬집으면서 "피청구인(윤석열)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고 국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리라는 믿음이 상실되어서 더 이상 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헌재, 박근혜 파면 땐 '진실성 없는 사과' 지적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이 국민 신임을 배반했다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이같은 역사적 맥락을 끌어온 것은 과거 대통령 파면 결정문과 비교해도 특색 있는 부분이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는지를 따질 때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서원의 국정개입 관련) 대국민 사과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은 점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검찰과 특검의 수사도 수용하겠다고 발표해놓고 관련 조사에 모두 응하지 않은 점 등을 꼬집었다.

헌재는 "피청구인(박근혜)은 자신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국민을 상대로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며 헌법 수호 의지를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대한 헌법·법률 위배 행위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 의지를 확인한 셈이다. 윤 대통령에 대해서도 헌재는 "(앞으로) 국민은 피청구인(윤석열)이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헌법이 규정한 것과는 다른 숨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닌지 등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했다"는 헌재의 지적은 설사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가 잘못됐음을 반성했다 하더라도, 이미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점을 못 박은 것으로 분석된다.

헌재 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시민들이 피 흘려 세운 헌법의 가치가 윤석열 정부에서 역사왜곡과 함께 퇴행하는 일이 반복됐고 그 끝에 12·3 비상계엄이 있다"며 "이번 파면 결정문은 독재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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