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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금강전도가 나란히…겸재의 작품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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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금강전도가 나란히…겸재의 작품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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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전이 열리고 있는 호암미술관 1층 전시장 들머리 공간. 겸재의 양대 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왼쪽)와 ‘금강전도’가 전시의 얼굴로 나란히 내걸렸다. 노형석 기자

‘겸재 정선’전이 열리고 있는 호암미술관 1층 전시장 들머리 공간. 겸재의 양대 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왼쪽)와 ‘금강전도’가 전시의 얼굴로 나란히 내걸렸다. 노형석 기자


한국 회화사의 거장은 소년 가장이었다.



14살에 서울 서촌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찌든 가난에도 그의 예술혼은 짓눌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모국 산천과 선조들 삶이 어우러진 풍경의 진수를 그리겠다는 필생의 꿈과 의지를 간직했다. 50대에 이르러 18세기 조선 미술판을 평정하고 21세기 현대 미술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거장이 되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입지전적인 성장사에 더해 놀라운 ‘멀티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연 풍경의 핵심을 절묘하게 축약하고 짚어서 그리는 진경산수화 형식을 창안한 주역이었다. 금강산과 서울 서촌, 한강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산하, 인간의 풍경을 자유자재로 편집하듯 펼쳐내면서 추상과 구상을 오가는 필치로 표현해냈다. 단순한 전업 화가에 머물지도 않았다. 주역과 천문학에 통달해 관련 관청인 관상감의 교수를 지내며 주역의 음양설을 그림에 녹여냈다. 서울 양천 등 각 지역 현감을 맡아 행정가로 일하면서도 화풍 닦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 거처인 서울 서촌 장동 인곡정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시 짓는 문인의 삶도 이어나갔다. 증조부대 이후로 벼슬길 끊어지며 가문이 몰락했지만, 퇴계 이황의 옛 학맥을 찾는 관련 시화집을 내며 가문 중흥을 위해 애썼다. 서촌에서 별세하고 수년이 지난 뒤 겸재를 총애했던 임금 영조는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의 직위를 내려주었다.



1층 전시실 중간 영역. 자신의 거처가 있던 서울 서촌 장동 일대와 한강 변의 풍경을 주로 담은 그림들이 나와 있다. 노형석 기자

1층 전시실 중간 영역. 자신의 거처가 있던 서울 서촌 장동 일대와 한강 변의 풍경을 주로 담은 그림들이 나와 있다. 노형석 기자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의 삼성문화재단 설립 60주년 기념전 ‘겸재 정선’ 현장에선 초인 같은 예인 겸재의 면모를 오롯이 작품 실물들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의 대표작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제색도’와 리움미술관 소장 ‘금강전도’,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 화첩’ 등 겸재 최고 명품들이 역대 최대 규모로 한자리에 펼쳐졌다.



겸재의 대명사인 진경산수화 명작들을 비롯해 관념산수화와 옛 선인·성현들의 삶을 담은 고사인물화, 꽃과 새, 동물을 그린 화조영모화, 초충도까지 모두 망라돼 1·2층 전시장을 채웠다.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등 18개 기관과 개인 소장품 165점(국보 2점, 보물 6건 57점)이 모였다.



1층 전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동영상의 일부분. 금강전도와 신묘년화첩, 해악전신첩 등 대표적인 금강산 그림 명작들의 세부를 실제로 드론을 타고 유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영상으로 편집해 화첩 속 실제 작품들의 연관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노형석 기자

1층 전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동영상의 일부분. 금강전도와 신묘년화첩, 해악전신첩 등 대표적인 금강산 그림 명작들의 세부를 실제로 드론을 타고 유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영상으로 편집해 화첩 속 실제 작품들의 연관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노형석 기자


준비에만 3년이 걸린 이번 전시회는 21세기 한국 고미술 전시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간송미술관을 국민적 명소로 부각시킨 2004년 대겸재 전 이후 21년만에 열리는 대형 전시로 그의 일생 화력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전무후무한 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고미술 컬렉션의 3대축인 간송미술관과 삼성가 리움·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이 합심해 거장들을 집중 조명한 두 번째 결실이란 의미도 지닌다. 1995~9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전이 첫 사례였고, 이후 30년 만에 세 기관이 컬렉션과 기획 역량을 다시 뭉치며 만든 자리다.



1층 전시장 들머리 공간에는 겸재의 양대 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가 전시의 얼굴로 나란히 내걸렸다. 최고 핵심 작품을 먼저 내세운 파격적 구도로, 뒤이은 100여 점의 작품들이 결국 두 작품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모양새다.



이번 전시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겸재의 임진강 기행그림첩 ‘연강임술첩’의 전시 영역. 노형석 기자

이번 전시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겸재의 임진강 기행그림첩 ‘연강임술첩’의 전시 영역. 노형석 기자


진경산수화를 집중 소개하는 전시 1부에는 먼저 시기별로 다르게 그린 금강산 그림들이 나온다. 초기 금강산 그림이 실경을 세밀하게 묘사했다면, 필법이 농익은 완숙기에 접어들면서는 세부를 압축하고 주제를 강조하거나 추상화한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금강산과 동해를 주제로 한 ‘해악전신첩’은 겸재가 진경산수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화첩이다. 1712년 그린 것은 소실됐고, 이후 노년기인 1747년 다시 그린 첩이 나오는데, 1930년대 매국노 송병준의 경기 용인 저택에서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것을 간송이 보낸 화상이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어 자신의 거처가 있던 서울 서촌 장동 일대와 한강변 풍경을 주로 담은 그림들이 나온다. 겸재가 나고 자란 한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장동팔경첩과 경교명승첩, 개성 등지의 지역 명승지를 그린 작품들이다. 대표작 ‘인왕제색도’는 비가 내린 뒤 갠 웅장한 인왕산의 모습을 묘사한 걸작이다.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의 으뜸 작품으로 꼽히는데, 5월6일까지만 공개된다. 그 뒤엔 간송미술관 소장품인 18세기 중엽의 가을 금강산 그림 ‘풍악내산총람’(보물)을 대신 내걸게 되는데, 맞은편의 겨울 금강산(개골산) 그림인 금강전도의 푸른빛 산악미와 조화를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 ‘칠선생시화첩’. 노형석 기자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 ‘칠선생시화첩’. 노형석 기자


겸재는 문인화, 화조화, 고사인물화 등 다른 장르 그림에도 밝았다. 2층 2부에서 이런 문인화와 화조화 등을 주로 소개한다. 문인들이 즐겨 읽던 시를 그린 ‘시의도’와 오랜 벗 사천 이병연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시화환상간’ 작품들이 나온다. 이를 통해 몰락한 사대부 집안 출신인 그가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과 문인의 자의식을 투영했다는 것을 일러준다.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장시성 여산(廬山)의 당나라 문인 백거이의 초당을 그린 ‘여산초당도’는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6월1일까지 전시된 뒤 여산 폭포를 그린 ‘여산폭’으로 바꿔 선보이게 된다. 처음 공개된 ‘칠선생시화첩’은 2011년 일본에서 처음 소개됐던 작품첩이다. 주희, 정호 등 송나라 학자들과 조선 초기 대학자 퇴계 이황 등 7명의 조선·중국 성리학 대가들의 고사인물도와 시들을 담은 화첩으로, 성리학 계보에 민감한 관심을 기울였던 겸재의 이념 성향을 실감할 수 있다. 1740~41년 나온 화첩 ‘경교명승첩’의 일부인 ‘척재제시’는 겸재가 당시 한강 하류에서 잡힌 생선 웅어꿰미를 아랫사람을 시켜 이병연에게 전달하면서 시를 청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진경산수와는 또 다른 소탈한 인간적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임진강 기행그림첩 ‘연강임술첩’은 두 화본이 처음 함께 전시돼 겸재가 상이하게 묘사했던 유람 풍경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



그간 겸재 화력의 연대기를 담은 전시는 간송미술관에서만 가능했다. 시기별 수작들을 고루 수집하고 미술사가 최완수와 그의 제자들이 30년 이상 봉직하며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겸재의 작품 서사와 의미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상징적 대작들의 존재감이 약하다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삼성가는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라는 희대의 대표 명작을 갖고 있었지만, 시기별 주요작품들을 고루 확보하지 못해 전체 기획전의 구색을 갖추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었다. 올해 삼성문화재단 설립 60돌을 맞아 삼성 쪽 제안으로 간송 컬렉션과 국립박물관이 출품대열에 가세했고, 온전한 겸재 작품 연대기가 가능해진 것은 큰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전은 국내 고미술 전시 역량의 진화도 보여준다. 기획진은 가장 많은 겸재 명작들을 모아 추리고 뜯어보면서 한 거장화가의 내면과 고뇌, 욕망을 부각하고 작품 행로가 인생사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 드러나게 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특정 거장의 삶과 내면의 흐름을 전 시기 그림들의 총체적인 갈무리 작업으로 재구성하고, 정교한 기획 틀로 고갱이가 드러나게 한 전시는 여지껏 없었다. 30년 전 단원 탄신 250주년 전에서 선구적으로 시도한 이래로 규모와 깊이, 품격을 고루 갖춘 거장의 연대기 전시는 이번에 처음 지평을 열어젖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6월29일까지. 내년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정선 탄생 350주년전으로 이어진다. 입장료 1만4000원.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740~41년 나온 화첩 ‘경교명승첩’의 일부인 ‘척재제시’의 세부 장면. 노형석 기자

1740~41년 나온 화첩 ‘경교명승첩’의 일부인 ‘척재제시’의 세부 장면.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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