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1950년 11월 스미스: 장진호 철수의 영웅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
6.25 전쟁 당시 미 해병1사단장(소장)이었던 올리버 스미스 해병 장군.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한다. |
한기에 몸을 벌벌 떨며 텐트를 나가니, 어제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분명 0도 근처에서 놀던 수은주는 밤사이 영하 23도로 고꾸라졌다. 전날까지 남아 있던 인디언 서머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진짜 겨울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 꺼낸 철제컵이 손에 쩍 달라붙었다. 전투식량은 꽁꽁 얼어붙어 도저히 깰 수 없었다. M1 카빈 소총은 발사되지 않았고, 헬리콥터도 뜨지 못했다. 극심한 추위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해병들은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추워서 그렇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이 집단쇼크 증상은 훗날 ‘shook’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나마 부상자의 상처마저 얼어붙어, 지혈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점이 추위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1950년 11월 11일, 함경남도 장진군의 인공호수엔 평년보다 혹독한 겨울이 더 빨리 찾아왔다. 바로 전날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1775년 11월 10일 창설)을 축하했던 미 해병대는 175년 만에 최악의 날씨를 맞이했다. 적을 만나기 전, 동장군과 한판승부를 벌여야 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악천후에서 치른 싸움. 장진호 전투는 기습적으로 찾아온 북극 한파와 함께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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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겨울 전투를 하던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 병력. 미 해병대(위키미디어 커먼즈) |
⓪배경: 미군은 왜 거기 있었나
장진호는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남단쯤 되는 곳이다. 주변에 번성한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가까운 도시가 남동쪽 산길로 90㎞를 가야 닿는 함흥이다. 북쪽엔 2,000m 급 준령과 넓은 고원이 펼쳐지고, 서쪽 평안도 땅으로 가려면 굽이치는 좁은 길을 통해 한반도의 등뼈(낭림산맥)를 넘어야 한다.
두 달 전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수복한 미 해병1사단은 어쩌다 이 오지까지 떠밀려 왔을까. 이미 해병대 왼쪽에선 국군6사단이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10월 26일)하고, 오른쪽에선 미7사단이 한중 국경 혜산진을 향해 진군(11월 21일 점령) 중이다. 전쟁이 다 끝날 것처럼 보이던 이때, 미군 최정예 사단은 점령할 도시나 마을조차 찾기 힘든 개마고원 황량한 땅을 터덜터덜 지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를 이해하는 것은 ‘왜 그 겨울 미 해병대가 그 오지에 있었나’라는 궁금증을 푸는 데서 시작된다. 가장 결정적 순간, 가장 잘 싸우는 부대가, 가장 깊은 산중을 헤매는 이 괴상한 광경을 만든 두 사람의 명령권자가 있다. 바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미 10군단장(동부전선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이다.
맥아더와 알몬드가 달았던 ‘칠성’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해병 2만5,000명의 목숨을 지켜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번 회차의 주인공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당시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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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미스 이력. 김대훈 기자 |
①조건: 무모한 상관은 적보다 무섭다
스미스의 직속상관은 알몬드였다. 그해 여름 낙동강 전투 때 맥아더와 월튼 워커 8군사령관 사이에서 농간을 부렸던 그 알몬드(당시 맥아더의 참모장)가 겨울엔 동부전선으로 와 스미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30511210000743)
미국 전사가들은 대체로 알몬드를 매우 거칠고, 심하게 공격적이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평가한다. 성과를 내려고 부하를 가혹하게 다그치는 것으로 악명 높았고, 항상 주변 사람 단점을 지적하면서 불화를 유발했다. 그에겐 “아무도 없는 사막에 두어도 분란을 일으킬 사람”(함께 일한 장교)이란 뒷말, “미 육군 역사상 가장 공격적 리더”(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란 평가가 따라 다녔다.
알몬드는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흑인 부대 92사단을 지휘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마치는 듯했으나, 야심가 알몬드는 전후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에 지원해 재도약을 모색했다. 맥아더 역시 알몬드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를 참모장으로 발탁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 별도 상륙부대(10군단)를 만들어 알몬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알몬드는 맥아더의 맹목적 추종자였고, 맥아더는 알몬드의 든든한 뒷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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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밥 호프(가운데)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을 위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이미 국군이 확보한 원산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항구 주변 기뢰 제거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장시간 동해를 맴돌며 입항을 기다려야 했다. 미 해병대 |
1950년 9월 15일 5,000분의 1 확률이라던 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0월 초 38선을 넘은 김에 아예 전쟁을 끝내 버리고자 했다. 유엔군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눠 한반도 서쪽에 워커 8군, 동쪽에 알몬드 10군단을 각각 배치했다.
정공법보단 한 방을 선호했던 맥아더는 ‘9월 인천’에 이어 ‘10월 원산’에서도 상륙 차력쇼를 선보이려 했다. 북한군이 무너졌던 당시, 유엔군이 원산을 확보하려면 서울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통해 육로로 밀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실리보다 화려함을 추구한 맥아더는 부대를 부산으로 보내, 힘들게 배에 태워 다시 상륙시키는 복잡한 전법을 택했다. 그사이 국군이 원산을 육로로 점령하자, 미 10군단의 전투 목표가 사라졌다. 10군단은 기뢰 제거 작업만 한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원산항에 걸어서 입항했다. 미 해병1사단도 그 부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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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국군·유엔군 북진 상황. 강준구 기자 |
맥아더는 10월 말 한반도의 가장 좁은 ‘목’(평양~원산)을 두 손(8군, 10군단)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낼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평양에 입성한 8군을 신의주와 압록강 하류로 올리고, 함흥 일대를 장악한 10군단을 8군의 동쪽에서 북상시켜 압록강 상류를 장악하는 구상이다. 그중 미 해병1사단은 흥남에서 장진호까지 북상한 다음, 방향을 틀어 무평리(지금의 자강도 전천군)까지 서진한 뒤,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임시수도 강계를 공략하는 초장거리 임무를 맡았다. 원래 해병대의 고유 임무는 상륙 후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해병대가 이렇게 내륙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건 이례적이면서도 위험한 작전이었다.
해병1사단은 이런 이유로 개마고원에 오게 됐다. 해안에서 멀어지며 장진호를 향해 가던 11월 초, 해병 정보참모들은 중공군의 움직임과 규모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계속 입수했다. 그러나 알몬드는 중공군 병력이 많지 않다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를 맹신했다. 알몬드는 중공군을 ‘세탁업자’(20세기 초 재미 중국인 다수가 세탁업 종사)라고 폄하하며 해병대에 무작정 전진을 강요했다.
맥아더와 알몬드는 단단히 틀렸다. 유독 추웠던 장진호 주변 산속엔, 알몬드가 얕보던 세탁업자 ‘12만 명’이 숨어 있었다. 미군을 기다리는 중공군 9병단(병단은 과거 국군의 야전군 규모)의 목표는 미군 최정예를 포위 섬멸해 미 정치권과 여론에 충격을 주고,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를 위해, 9병단 12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여러 겹의 덫을 치고 해병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8대 1의 싸움. 아직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악의 날씨에, 적이 있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캄캄한 산속으로, 군단장 알몬드가 사단장 스미스의 등을 거칠게 떠밀고 있었다. 무모한 상관은 적보다 무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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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공유 도메인) |
②각오: 최고의 가치는 부하의 생명
‘3중의 적’이 동시에 스미스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1)영하 30도 동장군 (2)몸을 숨긴 12만 명의 중공군 (3)적을 무시하고 ‘돌격’만 외치는 미국 장군.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추위에서 △아군을 포위한 적을 물리치며 △상관이 가리키는 곳과 반대로 △병력을 보존해 무사히 탈출하는 ‘미션 임파서블’이 스미스에게 주어졌다.
외향적이며 공격적인 알몬드와 비교해, 스미스는 모든 면에서 직속상관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를 졸업한 뒤 석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에 입사했다가,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해병 장교로 입대했다. 미국이 2차대전에 본격 참전하기 전부터 유럽(아이슬란드)에 배치된 해병대를 지휘했고, 2차대전 중 남태평양에 투입돼 일본군을 상대했다.
‘버클리 출신’이라는 이력처럼, 그의 리더십은 여느 해병대 장교의 거친 지휘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말투, 수준급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특히나 해병대 콴티코 기지 교관으로 있을 때 현대전의 여러 돌격 작전 효과를 수치로 분석한 뒤, 돌격은 그저 아군의 힘을 빼는 ‘가짜 영웅의 에너지 낭비’임을 증명했다. 타페의 평가처럼, 스미스는 알몬드와 ‘밤과 낮처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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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알몬드(오른쪽) 소장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도중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러나 스미스는 유하기만 한 군인은 아니었다.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던 외유내강 리더였다. 특히나 해병대를 모르는 알몬드 같은 육군 장군이 내리는 명령에 저항했고,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공략하는 과정(9월 하순)에서 이미 알몬드와 갈등을 빚었다. 알몬드는 스미스를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변명만 한다”며 폄하했고, 반대로 스미스는 알몬드를 ‘예측할 수 없이 돌출행동만 일삼는 사람(loose cannon)’으로 평가했다.
두 사람은 장진호에서도 극과 극의 접근 방식을 택했다. 후방 군단본부에 있던 알몬드는 빨리 전진하라고 독촉했지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던 스미스는 해병사단 진격 속도를 ‘거의 명령 불복종에 가깝게’(참전용사 마틴 러스의 회고) 고의로 지연시켰다. 영국 전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의 표현을 빌리면, 스미스는 ‘알몬드의 성급함 때문에 곧 해병대에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집중 운용하고자, 벌어진 연대 사이 간격을 최대한 좁혀 이동시켰다. 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함흥에서부터 장진호 사이 여러 곳의 보급 거점을 설치하고 각종 군수품을 쌓았다. 장진호의 거점 하갈우리(나중에 사단본부 설치)에는 공병 작업에 필요한 제재소를 세우고, 군수품 보급 및 부상자 이송을 위한 비행장까지 닦았다. 경비행기를 위한 간이 이착륙장이 아니라, 주력 수송기 C-47이 뜨고 내릴 수 있었던 정식 비행장(길이 870m, 폭 15m)이다. 비행장을 세워가며 전진했던 스미스의 고집스럽고 철저한 준비는 나중에 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살린다.
스미스는 해병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을 극도로 피했다. 불확실성이 보이면 나아가지 않았다. 장진호 근처에 도달해서는 이동 속도를 더 늦춰 하루 평균 1.5㎞(시간당 62.5m)만 가는 ‘거북이 진격’을 했다. 알몬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육군 장성인 그가 해병대 장군을 해임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길 순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스미스가 겁쟁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미스는 헬리콥터를 타고 추운 날씨에 최일선 순시를 강행했고, 11월 27일 밤 중공군 공격이 시작되자 다음 날 사단 지휘소를 하갈우리로 옮겨 전투 지역에 바짝 붙었다. 장진호 남단 마을인 하갈우리는 호수 서쪽(해병5, 7연대)과 동쪽(육군 특임대)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면서도, 이미 중공군 수 개 사단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가장 위급한 때 사단장이 포위를 자초하며 최전방으로 옮겨 전투를 지휘한 것이다. 6·25 때 포병장교로 참전한 러셀 구겔러는 “지휘관이 현장에 있다는 건 부대 사기를 높이고 무형의 전투력을 증대시킨다”며 “스미스 장군이 해병대 구호인 겅호(gung-ho·깡이나 배짱을 의미) 정신을 몸소 실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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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루이스 풀러 미 해병 대령(해병1연대장). 그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은 전설적인 해병 장교로, 나중에 중장까지 승진한다. 미 해병대 |
③전투: 미군 2만 명 몰살 위기
11월 27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 사이, 웅크리던 중공군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중공군 8개 사단은 △해병5·7연대가 배치된 최전방 유담리(장진호 서쪽) △사단본부가 있던 하갈우리(장진호 남쪽)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덕동고개(장진호 남동쪽 산지) △해병1연대가 있던 고토리(황초령 바로 북쪽) △보급기지 진흥리(황초령의 남쪽)까지 거의 동시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부대를 잇는 보급로도 대부분 끊겼다.
미군이 화력에선 우위였지만 병력 차가 최대 4배였다. 1개 사단으로 버틸 공격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56㎞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하고도 촘촘한 포위망을 쳐 두고 있었다. 맹렬한 추위와 높은 고도 탓에 철수 작전 난도는 더 높아졌다. 2차대전 때 주로 남태평양에서 활약하던 미 해병대에게 이렇게 추운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중공군의 포위 섬멸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고, 미 해병대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사단 병력 전멸 위기에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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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전개도. 강준구 기자 |
도쿄 사무실에 앉아 전쟁을 낙관하던 맥아더도 전멸 직전 해병대의 상황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전투 개시 다음 날인 11월 28일 맥아더는 본국 합참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전쟁에 직면해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이제는 사령부의 통제와 힘을 벗어나는 상황을 맞이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존심 강한 전쟁영웅이 한국전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앓는 소리’였다. 맥아더의 후퇴 지시를 받은 알몬드는 그제야 해병1사단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워낙 철저한 포위를 당한 탓에 공중보급 외엔 군단 차원에서 해줄 게 없었다. 오로지 스미스 휘하 부대와 해병항공대 지원만으로 겹겹의 포위를 뚫어야 했다. 미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지만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퇴는 진격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후퇴 작전 첫 단계는 가장 앞으로 나가 있던 유담리의 해병 5·7연대를 하갈우리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덕동고개를 사수해야 했다. 단 1개 중대(해병7연대 F중대)가 이 생명줄을 지키고 있었다. F중대 245명은 11월 28일 새벽부터 16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냈다. 당시 공격에 가담한 중공군 병력은 3,000명 이상의 연대급으로 추정된다. 이후로도 F중대는 병력 증원을 받지 못하면서 12월 2일까지 4박 5일 동안 공격을 격퇴했다. 사상자가 중대 병력의 4분의 3에 달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F중대는 덕동고개를 끝내 사수했다. 이 덕에 8,000명의 2개 연대 병력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F중대가 사살한 중공군만 1,000명이 넘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F중대에서만 미군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가 2명(중대장, 일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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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설치된 미 해병대의 부상자 대기소 모습. 민가를 이용한 시설이다. 미 해병대 |
④믿음: 다쳐도 끝까지 데려간다
12월 4일 사단 본부로 후퇴한 해병5·7연대는 본부 병력과 합세해 12월 6일 하갈우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이 철수 또한 쉽지 않았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를 거쳐 진흥리에 이르는 길은 깊은 계곡 지대에 있었고, 계곡 양쪽에 다수 중공군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해병1사단은 매복한 중공군과 고지전을 벌여가면서 후퇴해야 했다.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해 11일 흥남에 도착할 때까지 5박 6일 동안 134명의 해병대 전사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스미스는 ‘중장비를 모두 파괴하고 사단 병력을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해병대 역사상 그런 수치는 없었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싸우면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장비를 버리며 철수하면, 스미스의 계산으론 최소 2개 대대 병력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하갈우리에서 흥남까지 102㎞를 도보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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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헬기를 통해 이송되는 미 해병대 부상자. 미 해병대 |
걸을 수 있는 경상자나 트럭에 태울 수 있는 부상자는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몸을 가눌 수 없거나 응급수술을 요하는 중상자를 실어 나르는 게 문제였다. 스미스가 바득바득 우겨 가면서 세웠던 하갈우리 비행장이 비로소 큰 힘을 발휘했다.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옮길 수 있는 부상자는 하루에 6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공간이 넓은 C-47 수송기를 이용하면 10배 이상의 부상자를 흥남이나 일본으로 바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영하 20도에 땅속 50㎝까지 꽁꽁 언 동토를 파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1월 27일 밤 전투가 시작된 후 30일까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누적되고, 매일 100명 이상의 비전투 사상자(주로 동상)가 나왔다. 결국 스미스는 공사 진행률 40% 단계에서 비행장을 임시 가동하기로 했다. 12월 1일 오후 한 용감한 C-47 수송기 조종사가 아직 울퉁불퉁한 하갈우리 비행장에 가뿐하게 착륙하는 데 성공했고, 30분 후 24명의 부상자를 싣고 다시 떠올랐다. 스미스는 당시 “하갈우리 활주로가 뉴욕 라과디아 공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부터 5일간 미군은 육군과 해병대 부상자 4,312명(꾀병 포함), 사망자 유해 137구를 수송기에 실어 날랐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성마른 진격 명령을 꿋꿋이 버티며 비행장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다.
부상자 이송은 ‘적을 죽이는 행위’와 직접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일선 부대 사기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해병대가 사상자 이송에 항공 전력을 동원한 것은 ‘언제 어디서 죽거나 다쳐도, 끝까지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사단장의 확고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연히 지휘관과 일선 해병들 사이에 돈독한 신뢰감이 형성됐고, 사단장이 극한 상황에서 내리는 명령이 일선에서 철저히 지켜질 수 있었다.
미 해병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해병1사단의 인원 손실은 전사 561명, 부상 2,872명, 실종 182명 등 총 3,615명(육군 별도)에 달했다. 그나마 스미스가 꼼꼼한 대비와 과감한 작전으로 훌륭하게 철수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공격 명령에 동조해 병력을 무작정 밀어 올렸더라면 해병1사단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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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1사단 병력이 1950년 12월 9일 개마고원 입구인 황초령을 넘어 함흥 방향으로 철수하고 있다. 미 해병대 |
⑤결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사단장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진호 전투의 승자는 중공군이다. 그러나 전체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장진호 전투는 성공한 싸움을 넘어 군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박종상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평가받는다. 2차대전 최고의 후퇴작전인 됭케르크 철수(1940년)에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갔다. 이에 비해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4배에 이르는 적을 맞아 편제와 대형을 유지한 채, 적을 격퇴해 가면서 질서정연하게 후퇴한 작전이었다. 미 해병대도 공식 전사(‘US Marines in the Korean War’)를 통해 해병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로 장진호를 기억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의 나비효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스미스의 빼어난 철수 작전은 일개 전투 수준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흐름을 바꿨다. 우선 미국의 전략군이라 할 수 있는 해병사단이 전력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다. 해병1사단이 중공군 9병단 병력 대부분을 잡아둔 동안 나머지 미10군단 병력은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했다.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무너졌더라면 10군단 예하 사단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기적의 철수 작전’이라 불린 흥남철수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10군단은 부산과 거제 등으로 일단 물러났다가, 재정비를 거친 후 1951년부터 중동부 전선을 담당했다. 매슈 리지웨이가 주도한 역습에서 허리 역할을 맡았고, 수차례 중공군 공세를 격퇴하며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밀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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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함경남도 함흥에 조성된 해병대 장병 묘지에서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
스미스의 장진호 철수는 그냥 후퇴가 아니라, 적과 맹렬히 싸우며 서서히 물러가는 ‘공세적 후퇴’였다. 미 해병대도 인명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 병력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중공군 사상자는 최소 2만 명(중국 집계)에서 최대 6만 명(미국 집계)이다. 그나마 중국 집계엔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만 명이 빠진 것이어서, 중공군 입장에선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다가 사실상 1개 병단 전체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중공군 9병단은 막심한 피해를 추스르느라 12월 31일 3차 공세엔 합류하지도 못했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6만 명을 보충해 겨우 전선에 돌아왔다. 만약 9병단이 미 해병대를 잡고 전력을 유지했더라면, 3차 공세 당시 유엔군은 37도선(평택~원주~삼척)보다 더 아래까지 쓸려 내려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더 뒤로 밀리면 아예 한국을 포기할 계획까지 세워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병1사단의 분전은 유엔군 전체를 패배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됐다.
6·25처럼 야전군 규모 이상이 맞붙은 대규모 전쟁에서, 이렇게 한 명의 사단장이 전체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기애가 강했던 총사령관(맥아더)과 가장 무모했던 군단장(알몬드) 아래, 스미스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단장이 있었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그저 그런 장군이 해병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알몬드의 등쌀에 밀려 사단 전체가 전멸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고 미국은 전쟁을 거기서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6·25에서 여러 유엔군 사단장이 활약했지만,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단장 중 한 사람을 올리버 스미스로 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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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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