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 못 견딘 싹 변색…경북 의성군 마늘밭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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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새싹 살아나라고…눈물 대신 뿌리는 영양제 1일 경북 의성군 신평면 용봉리에서 농민 오주석씨가 산불 열기에 줄기가 그을린 마늘 싹에 영양제를 뿌리고 있다. 의성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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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사과·송이·고추 등 다른 생산지들도 피해 크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정부, 피해 파악해 빨리 지원을”
“그래도 어쩝니꺼. 농사밖에 할 줄 모르는데…”
1일 오전 경북 의성군 신평면 용봉리 한 마늘밭에서 만난 농민 오주석씨(66)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씨는 밭고랑을 따라 천천히 뒷걸음치며 호스를 좌우로 움직여 마늘밭에 골고루 영양제를 뿌렸다.
파릇파릇해야 할, 20~30㎝쯤 올라온 싹들이 누렇게 변했다. 최근 산불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을려 버린 것이다. 약 1200평의 마늘밭은 오는 6월 중순 수확을 앞뒀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오씨는 “지금은 멀쩡해보이는 싹들도 차차 변하게 될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오씨는 “고향에서 40년 넘게 농사지으며 두 자녀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마늘밭에 큰 생채기가 남았다”며 “이번 불이 참 야속하지만 희망을 버릴 수야 있겠나. 그저 농부로서 최선을 다해야지”라고 말했다.
경북도는 이번 산불로 의성·안동·영양·영덕·청송 5개 시군에서 농작물 3414㏊가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했다. 마늘과 사과를 비롯해 송이(영덕), 고추(영양) 등 특산물 생산지가 직격탄을 맞았다. 농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차분하게 희망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용봉리에는 의성 대표작물인 마늘뿐 아니라 자두·사과·복숭아를 재배하는 농민도 많다. 이 마을 46가구(65명) 중 절반이 농사를 짓는다. 지난달 25일 산불이 덮치면서 주택 21채와 밭, 과수원 등이 타버렸다.
또 다른 마늘밭에서 싹을 살피던 이석민씨(45)는 “(산불 때문에) 일이 안 되지만, 안 할 수도 없지 않으냐”며 웃어 보였다. 이씨는 잡초를 솎아내기 쉽도록 피복작업을 해 둔 마늘밭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의 밭은 우수한 품종의 씨마늘을 얻기 위한 사전 절차로 ‘주아’(마늘쫑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마늘)를 품고 있었다. 이씨가 피해를 본 마늘밭을 돌볼 때 의용소방대원인 그의 남편은 잔불을 잡기 위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경북 청송군 진보면 기곡리에서 만난 전재섭씨(71)는 약 1200평 넓이의 과수원에 심은 사과나무 중 60%가 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이 마을에서는 ‘청송 사과’를 재배한다. 산불로 과수원은 물론 주택과 농기계 등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
“평생을 건설직에 종사하며 경기 일산에서 살다 이 마을에 정착한 지 올해로 11년째”라는 그는 이미 농사를 짓다 두 번의 실패를 겪었다. 사과를 재배하면서부터 성과가 좋았다. 지난해 사과농사를 통해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올해도 수확량을 기대했지만 산불로 앞날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전씨는 “나무가 불길을 머금은 만큼 피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생계가 걱정스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과수 농가의 경우 나무가 상하게 되면 수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무가 살아남아도 연기를 흡수하거나 재 등에 노출돼 정상적 생육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 차원에서 피해를 집계해 지원책을 내놔야 한다는 게 농민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약 1400평 농지에서 복숭아 등을 재배해 온 농민 황병윤씨(74)는 “산불의 거센 열기를 받은 나무들이 마치 전염병이 돌 듯이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다”며 “꽃눈이 타버린 나무를 베어내고 새 묘목을 심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농민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묘목도 1그루당 2만원 정도는 줘야 하고, 지금 심는다고 해도 앞으로 4년은 지나야 첫 수확이 가능하다”며 “나처럼 나이가 많은 농민들이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겠나 싶다”고 덧붙였다.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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