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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회 속에 잔인해진 나의 최선은 뭘까" [송지현의 자.독.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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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회 속에 잔인해진 나의 최선은 뭘까" [송지현의 자.독.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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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순 장편소설 '컨설턴트'

편집자주

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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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면 책을 펼친다. 신간을 읽기도 하지만 주로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펼치곤 한다. 그러니까 글은 매일 잘 안 써지고 나는 매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엔 더욱 글쓰기가 힘든데, 바로 장편소설 쓰기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을 쓰던 것과는 모든 것이 다르기에 컴퓨터를 켜기가 무섭다. 글은 예전보다 더 자주 안 써지고 그럴 땐 예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 읽으므로 요즘 내 책상엔 다른 작가들이 출판한 장편소설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임성순의 '컨설턴트'도 장편소설 더미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컨설턴트'는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불행들을 누적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킬러의 이야기다. 이 킬러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의 일상을 면밀히 관찰한 뒤 그 일상을 아주 사소한 부분을 비틀어두는 것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대상은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지만 결국엔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왜 계속 들춰보는 것일까? 작법서를 들여다보며 소설을 설계해야 할 시간에.

이 소설의 마지막은 킬러인 주인공이 인간 개인 자체가 거대한 구조 속에 숨어서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목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목격에 불과해서 개인은 어쩌면 존재하는 내내 잔인할 것이고 내내 자신의 가혹성을 모르게 될 것이다. 사회라는 큰 구조 안에서 개인이 겪는 작은 불행들은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컨설턴트·임성순 지음·은행나무 발행·296쪽·1만7,000원

컨설턴트·임성순 지음·은행나무 발행·296쪽·1만7,000원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소설을 쓰는 동안 일종의 컨설턴트가 되는 기분이다. 그들의 일상을 재배치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떠한 장면으로 이끌어가는. 어느 날은 대사를, 어느 날은 장면의 순서를, 또 어떤 날은 인물의 성격을 아주 조금씩 비틀어본다. 변화는 미미하지만, 그 작은 차이들이 결국 이야기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런데 나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겁하더라도 구조 속에 숨어서 매일의 사소한 불행을 지나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들은 때론 누군가에게 잔혹할 테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일상을 살아갈 뿐일 것이다. 때론 자신의 가혹성에 놀라면서, 하지만 곧 잊으면서.

나는 '컨설턴트'의 킬러처럼 내가 만들어낸 구조를 밀어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으면서 그저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본다. 등장인물들의 하루를 관찰하고 그들의 사소한 행복과 불행을 짚어간다. 어쩔 때 나는 그들이 아주 천천히 무너지는 걸 본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이 맞이하는 일상 속 균열에 조금의 숨구멍을 남기는 것뿐이다. 나 또한 소설을 쓰고 있는 개인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어쩌면 이야기라는 구조 뒤에 숨어서 언제든 비겁해지고야 말기 때문이다.

컨설턴트를 덮고 나면 다시 나의 소설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무너지는 세계, 그러나 그 안에 작은 숨구멍 하나쯤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 그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고, 내가 이토록 자주 이 책을 펼쳐보는 이유다. 구조 속에 숨어서 비겁해지지 않기. 마지막 주인공의 깨달음처럼 그것이 나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송지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