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
‘말’은 단순히 목구멍을 통해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의 내용 뒤에는 말하는 사람의 의미와 의도가 담겨 있고, 그 말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과 느낌이 따릅니다. 말은 쓰임새에 따라 듣는 사람의 마음에 영양분을 공급해 성장을 돕는 ‘밥’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 사람 마음에 아픈 상처를 입히는 ‘칼’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말을 이용해서 진단과 치료를 하는 분석가는 말을 연구하고 다듬으며 제대로 쓰는 연습을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연륜이 쌓인 분석가는 할 말을 세밀하게 조심해서 선택합니다. 정제된 말이 글로 이어져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명을 세계적으로 날리는 분석가도 꽤 많습니다.
거친 말은 듣는 사람을 밀어냅니다. 예를 들어 분석가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피분석자는 짐짓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거친 말에 넘어가면서 서로가 멀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분석가는 오히려 부드럽게 대응합니다. 부드러운 말은 듣는 사람을 다가오게 합니다. 피분석자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분석가의 말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변덕을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진심이 느껴져야 듣는 사람이 받아들입니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분석가가 갑자기 말을 바꾸면 신뢰에 금이 갑니다. 한결같은 말은 상투적인 말과 달리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말을 바꿀 필요가 생기면 솔직하게 이유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흐리터분한 말은 관계를 오염시킵니다.
신체 폭력만이 폭력이 아닙니다. 말로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피분석자와 분석가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실린 이야기가 오갈 때에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분석가가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각자 자기 성찰을 할 공간이 확보돼 서로의 마음이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주고받는 말의 울림에 따라 소통과 이해의 공간이 열리기도, 닫히기도 합니다. 공감에 기반을 둔 말은 공간을 넓히고 비난으로 점화된 말은 공간을 없애거나 막습니다.
일상의 관계와 달리 정신분석 관계의 최종 목적지는 관계를 끝내는 ‘종결’입니다. 피분석자가 분석가를 떠나 이전보다 더 독립적이고 생산적으로, 자유롭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분석가의 의도대로 살도록 매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석가의 말은 그 과정에서 피분석자가 주도적으로 성장하는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의도가 깔려 있어도 상대방의 자존감을 뒤흔드는 말은 관계를 단절합니다. 분석가는 재판관이 아니고 조력자입니다. 냉철한 비판에 매몰돼 관계를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관계가 상처를 입으면 말의 역할은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말이 작별을 고하면 침묵이 지배합니다. 그렇게 되면 소통과 이해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소망일 뿐입니다.
분석적 대화는 일상적 대화와 다릅니다. 분석적 대화만이 분석에 따른 개인의 변화를 촉진합니다. 일상적인 설득이나 압박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발을 불러옵니다. 일단 분석가는 피분석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말이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충분히 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먼저 내세우면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기 어려워도 분석가는 참으면서 들어야 합니다. 분석이 효과를 내려면 긴 시간이 걸립니다. 소나기 같이 갑자기 퍼붓는다고 분석이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피분석자가 놀라고 긴장하면서 분석이 멈춥니다. 저항을 줄이는 세련된 분석은 안개비처럼 매우 가늘게 서서히 적셔 들어가는 것입니다. 분석가 자신이 하는 말을 세밀하게 조율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