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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 2m 텐트에 다닥다닥… “이런 불은 처음” 겁에 질린 주민들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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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인생 이런 산불은 처음”

의성 산불에 뜬눈으로 밤샌 주민들

도움의 손길도 잇따라

“태어나서 73년을 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집을 두고 대피한 건 처음이야···. 뭐 챙길 새도 없이 몸만 두고 빠져나왔어.”

23일 이틀째 이어진 경북 의성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체육관에서 만난 배인규(73)씨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배씨는 전날 오후 3시쯤 이장이 “얼른 나오라”고 소리쳐 집 문을 열었다. 배씨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마을 앞 야산 능선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마을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만 빠져나와 마을 주민과 부리나케 대피소로 대피했다고 했다.

경북 의성군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체육관 텐트 앞에 이재민이 벗어둔 신발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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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마다 크고 작은 산불로 고통을 받던 경북 주민들이 또 한 번 고통의 순간을 마주해야 했다. 불은 전날 오전 11시24분쯤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에서 발생했다. 밤사이 서풍에 영향을 받아 불길은 단곡면과 점곡면 일대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화마의 흔적은 강렬했다. 이 불로 하루아침에 건물 24채가 불에 타 잔해만 남았다. 이밖에 건물은 2채가 반소됐고, 3채는 일부가 타 재산 피해를 냈다. 이번 불로 35개 마을, 639가구에서 주민 1221명이 의성체육관 등으로 대피했다. 또 의성군공립요양병원 등 관내 병의원에서는 총 347명이 이송됐다.

직접 찾은 의성의 야산 곳곳에서는 꺼지지 않은 불길이 눈에 띄었고, 메케한 연기도 피어올랐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연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불을 끄기 위해 물을 퍼다 나르는 헬기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눈 같은 희뿌연 재도 날려댔다.

이날 의성체육관 실내에는 가로·세로 2m, 높이 2.5m짜리 노란색 텐트 25여 동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재민 수용 공간을 늘리기 위해 폭 50㎝ 남짓의 통로를 제외하곤 모두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마다 보통 3명 가량이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산불을 간신히 피한 주민들은 “이런 불은 처음 본다”고 입을 모았다.

경북 의성군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체육관에 텐트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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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에 깔린 매트 위에 누워 있던 김모(81)씨는 “눈을 감아도 불길이 보이는 것 같다”면서 “뉴스에서 산불 이야기를 볼 때는 남일 같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공포감이 컸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또 다른 주민 이모(63)씨는 “진화가 더디다고 들어 걱정이 크다”며 “얼른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대피소에는 주민뿐만 아니라 요양병원에서 이송된 60여명의 환자도 있었다. 점심 식사시간이 되자 20여명의 요양사의 손과 발은 더 분주해졌다. 이들은 매트 위에 누워 있는 환자를 2인 1조로 한 명씩 일으켜 식사를 도왔다. 요양사 한 명이 노인의 등을 맞대고 있으면 또 다른 요양사가 식사를 돕는 식이었다. 평소라면 침대를 일으켜 식사만 도우면 되지만 매트에 누워 있는 노인이 혹시나 체할 수 있어 등을 받쳐야 하기 때문이다.

22일 오전 11시 45분쯤 경북 의성군 안평면에서 시작한 산불이 오후 10시가 넘도록 계속 확산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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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선(69) 요양보호사는 “평소보다 갑절로 힘이 들지만 어르신들을 두고 갈 수 없지 않냐”고 했다. 김씨는 야간 근무가 끝나고 퇴근 무렵 산불이 나 사흘째 환자를 돌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쓰러지겠다”며 “전날도 어르신들이 돌보느라 2시간 정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두 눈을 붉게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진 상태였다. 다른 요양사도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지 못했다. 이들은 환자들의 소변을 500㎖짜리 빈 페트병에 직접 받아내는가 하면 약봉지를 챙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곳에는 외국인 노동자 수십명도 대피해 있었다. 네팔에서 온 빔나트(36)씨는 전봇대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데, 전날 불로 동료 15명과 함께 이곳으로 대피해 왔다고 말했다. 빔나트씨는 “한국에 온 지 8년째인데 이런 불은 처음 봤다”며 “지금도 가족 생각이 많이 나는데 얼른 진화되면 좋겠다”고 했다.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 거우캄 우타머(35)씨도 “대피소 생활이 힘들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챙겨줘서 고맙다”며 “이재민들이 하루빨리 집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경북 의성군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체육관에서 만난 주민이 구호 세트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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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손길도 잇따랐다. 자원봉사자 200여명이 대피소를 찾아 손을 거들었다. 정미란(55) 의성읍여성자율방범대 총무는 “전날부터 지금까지 배식급식봉사와 이곳저곳 일손을 돕고 있다”며 “하루빨리 진화되길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산림청 중앙사고수습본부와 경북도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기준 의성 산불 진화율은 30%다. 전날 오전 11시 25분쯤 안평면 괴산리 야산 정상에서 발생한 산불은 초속 5.6m가량인 강한 바람을 타고 동쪽 방면인 의성읍 방향으로 번졌으며, 당국은 산불 대응 3단계를 발령해 대응 중이다. 현재 산불영향 구역은 3510㏊며, 전체 화선 68㎞ 가운데 20.4㎞에서 진화가 완료됐으며 47.6㎞는 여전히 진화 중이다.

경북도 관계자는 “전날보다 바람이 잦아든 덕분에 진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연기가 적게 발생하는 쪽으로 진화 헬기를 대거 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성=글·사진 배소영 기자 sos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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