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양한 정보기술(IT) 부품을 삼성 등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오너 최 모씨(52). 그는 사업뿐만 아니라 주식 투자 포트폴리오도 여간 단단하지 않다.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비결은 복잡하지 않다. 특정 국가의 어느 한 종목이 아니라 독일·이탈리아·미국·한국 등 4개국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를 사모았다. 최씨는 "네 개 국가에 25%씩 투자하고 있다"며 "작년에는 미국 한 곳에 투자한 것보다 못한 수익률이었지만 올해는 미국 나스닥 조정기에 유럽 ETF가 이를 만회해주고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IT 주식을 중심으로 조정 장세가 펼쳐지며 '올웨더 포트폴리오' 전략이 각광받고 있다. 올웨더(사계절) 전략은 주식·채권·금·원자재 등 서로 다른 자산을 자신의 성향과 경기 국면에 맞게 분산 투자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의 창립자 레이 달리오가 주창한 투자 이론이기도 하다. 최씨의 투자 전략은 올웨더의 국가별 분산 버전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강도 관세 정책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시 등장했다. 인공지능(AI) 관련 IT 주식이 많은 미국과 달리 금융과 방위산업 비중이 높은 유럽 시장이 '트럼프 피난처'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월가조차도 미국보다 유럽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JP모건은 독일의 재정 완화 계획에 힘입어 2025년 유로존의 성장률을 직전 예상보다 0.1%포인트 높인 0.8%로 예상했다. 2023~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신음했던 독일은 향후 10년간 방산과 인프라스트럭처에 약 780조원을 쏟아붓겠다며 일종의 재정을 통한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스스로 '환자'라고 판단하고 긴급처방을 시행한 독일이 주식시장에서 빛을 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5번 연속 금리를 내리며 기업 비용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각종 호재로 최근 DAX지수는 사상 최고가로 내달렸다. 독일 못지않게 제조업이 강한 이탈리아 증시도 힘을 내고 있다. 반면 미국은 아직 금리 인하가 시기상조라고 외치며 상반된 분위기다. 투자 사계절로 치면 유럽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미국은 아직까지 겨울인 셈이다.
올해 들어 주가 상승에 환차익이라는 '덤'이 가세하면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 독일 DAX지수는 올 들어 지난 3월 17일(현지시간)까지 15.6% 올랐다. 이를 추종하는 EWG는 같은 기간 22.7%로 더 많이 올랐다. 최근 유로화 강세로 달러 기반 유럽 ETF 상품 투자자들이 초과 수익을 거둔 것이다.
독일 ETF로 머니무브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감과 경기 심리가 동시에 꺾이며 '인베스코 QQQ 트러스트(QQQ)' 등 미국 지수 하락세를 부추겼다. QQQ의 주요 구성원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등 고성장 고평가 기업들이다. 금리 인하 시 비용 부담이 줄어 주가 호재인데 아직까지 '언감생심'이다. QQQ에서 IT 비중은 51%다.
미국산 AI가 잘나갈 때 QQQ도 급등했다. 2024년 한 해 수익률이 31.7%에 달한 이유다. 그러나 올 들어 이날까지 수익률은 -5.6%로 부진하다. 기관투자자 등 '큰손'들이 고평가된 미국 주식을 팔고 있다는 뜻이다. 다음 행선지는 독일이다. EWG로 유입되는 자금 규모가 최근 한 달 새 10배 이상 급증했다.
투자자들이 독일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트럼프가 바라는 제조업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독일의 제조업 비중(부가가치 기준)은 2021년 기준 20.4%다. 미국은 11.1%로 독일의 절반 수준이다. 수년간 이뤄진 제조업 분야에서의 집중적 구조조정도 향후 실적 전망을 밝게 한다.
일찌감치 구조조정과 사업 전환을 단행한 지멘스 주가는 올 들어 18일까지 25.3% 올랐다. 글로벌 공장 자동화의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사업을 키우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멘스는 작년 10월 말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알테어'를 약 14조6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 작업은 올해 끝나 2025년 주당순이익(EPS)에 포함될 전망이다. 독일 산업재엔 '방산 공룡' 라인메탈도 포함돼 있다. 트럼프발 '각자도생' 정책에 독일 등 유럽이 재무장에 나서면서 방산이 최대 수혜 업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라인메탈 주가는 올 들어 이날까지 139.3% 급등했다.
EWG에서 산업재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업종은 금융(21.3%)이다. 보유 종목 서열 3위 알리안츠(8.41%)가 이 업종 대표주다. 알리안츠의 배당수익률은 5.3%다. 국내 시중은행 예금 금리의 2배가 넘는다. 전 세계 70개국에서 보험 사업을 하면서 주주들에게 안정적 배당을 지급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강한 특성으로 주가 상승과 배당금 인상이라는 '일석이조'를 기대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 EWG에서 IT 비중은 18.6%다. 대표 종목은 세계적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인 SAP다. 독일 내 시가총액 1위 기업이라는 존재감으로 국내에선 '독일의 삼성전자'로 통한다. 작년 독일 증시를 '멱살캐리(멱살 잡고 이끎)'한 SAP는 2025년 들어 주가 조정을 받고 있다.
EWI의 올해 수익률은 21%로, 독일(22.7%)을 바짝 뒤쫓고 있다. EWI의 양 날개는 은행과 방산이다. '유니크레디트'(UCG)의 주가는 올 들어 39.7%나 올랐다. UCG 등 유럽 주요 은행들은 미국식 주주환원에 열을 올리면서 투자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UCG는 2023년 전체 순이익에 버금가는 86억유로를 주주배당으로 풀기로 했다.
초대형 인수·합병(M&A)에 대한 기대감도 작용하고 있다. 최근 UCG는 자국 내 경쟁 은행인 '방코BPM'을 인수해 이탈리아 최대 은행은 물론 유럽 '톱6' 은행으로 도약하려는 계획을 내놨다. 이 계획에는 M&A 이후 2년 내에 연간 12억유로의 매출 시너지와 EPS 10% 상향이 포함돼 있다. 은행 통합으로 비용이 줄어 EPS가 올라가면 자연스레 주주환원도 늘게 된다.
독일 라인메탈처럼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역시 급부상하고 있다. 1948년 자동차 국영기업에서 출범한 이 상장사는 2016년에 자국 예술가 겸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으로 새출발하게 된다. 전투기와 헬리콥터는 물론 방위 시스템과 우주 사업까지 방산 분야를 아우르는 레오나르도 주가는 올 들어 83% 급등했다. 이 상장사는 자동차 기반 회사에서 방산으로 빠르게 전환한 사례다.
유럽 지수를 추종하는 미국 내 ETF의 경우 익숙한 미국 거래 시간에 맞춰 매매할 수 있다. 다만 환율 여건에 따라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면 유럽 지수를 추종하는 미국 ETF 수익률이 지수 수익률을 밑돌 수 있다. ETF 역시 '종목의 집합'이므로 상대적으로 주가가 많이 오르면 고평가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ETF 역시 PER 기준으로 고·저평가가 가능하다. QQQ의 경우 지난 1년 실적 기준 PER이 30.94배에 달한다. EWG와 EWI는 각각 19.19배, 13.58배다. 국가별 증시로 치환하면 미국이 가장 고평가돼 있고, 이탈리아가 가장 저평가된 셈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반에크'의 마르틴 로제뮐러 유럽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에 친국방 정부가 들어서는 정치적 변화와 무제한 양적완화는 유럽 방산주와 국가 ETF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라며 "방산에 대한 지원에서 자금 조달 등 일부 문제가 남아 있는 점은 리스크"라고 밝혔다.
[문일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