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최장수 청와대 셰프 천상현
청춘 바친 청와대
호텔 중식당 설거지부터 시작
화교 독점 ‘불판’ 최초로 잡아
‘대가’ 후덕죽 추천받아 靑 입성
정권 바뀌어도 홀로 살아남아
대통령 5명 거쳐
DJ ‘중식 애호가’ 매끼 즐겨
MB, 음식 남기는 것 싫어해
서민적 盧·文 막회·국밥 선호
박근혜 小食하며 獨床 고집
영암군 돕기 ‘인생2막’
고향땅 빈 점포들 안타까워
郡과 함께 청년 창업 컨설팅
레시피 개발·운영 노하우 전수
여행객 찾는 ‘핫플’로 키울 것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5명의 식사를 준비했던 청와대 총괄조리팀장 출신 천상현 셰프가 세계일보 사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통령들의 입맛을 홀린 손맛으로 낙후된 지역 경제를 살리고 후배 요리사를 양성하는 데 발 벗고 나선 천 셰프는 “기본을 다지지 않은 요리는 얼마 못 가 손님에게 들통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제원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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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경제 살리는 청와대 셰프 손맛
청와대에서 청춘을 바쳐 주방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일까. 최근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천 셰프의 첫인상은 카리스마가 넘쳤다. 청와대 봉황 마크를 새긴 셰프복도 방금 다린 것처럼 주름 하나 없다. 마치 음식 영화 속 레스토랑 조리실에서 군인처럼 엄격하게 후배들을 다그치는 셰프가 필름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그를 만나자마자 손부터 살폈다. 어떤 손이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청와대를 지킬 수 있었을까. “2018년 7월31일자로 명예퇴직했는데 20년 4개월 동안 청와대 조리실을 지켰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황희 정승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을 모셨다고 해요. 그는 24년 동안 왕 7명을 옆에서 지켰는데 그다음 기록이 저라고 하네요. 하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리팀 직원은 대부분 교체됐는데 거의 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어요. 운도 좋았지만 돌이켜보면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면서 음식 맛을 잘 지킨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첫인상과 달리 쾌활하고 유머가 넘치는 천 셰프는 요즘 고향인 전남 영암을 오가느라 분주하다. 영암군과 손잡고 낙후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단다. “지난해 영암군에서 요청이 왔어요. 유명 셰프가 음식을 소재로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영암뿐 아니라 요즘 시골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빈 상가만 계속 늘고 있어 큰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를 개발하면 소상공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제 이름으로 식당도 내고 지역 청년의 레시피(조리법) 개발도 도와 음식으로 특화된 핫플레이스를 만들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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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시작한 셰프의 길
“보험사에 6개월 다녔는데 전혀 성격과 안 맞았어요. 어느 날 친구가 신라호텔 중식당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알려줘 곧장 달려갔죠. 요리 자격증이 없었기에 조리기구 설거지 등 허드렛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조리실 ‘면판’에 배속됐어요. 중식당은 맡은 일에 따라 불판, 칼판, 면판으로 나누는데 면판은 말 그대로 면 뽑는 일을 해요. 하루는 면 반죽 기계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7바늘을 꿰맸어요. 지금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엔 깜짝 놀랄 만큼 트라우마로 남아있답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시작한 천 셰프는 4년 만에 드디어 불판에 입성했다. 당시만 해도 5성급 호텔에서 프라이팬을 다루는 불판은 화교의 독차지였다. 한국 요리사는 천 셰프가 유일했기에 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다 불판 5~6년차 때 청와대에서 처음으로 중식 요리사를 뽑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를 청와대에 추천한 이가 바로 우리나라 조리업계 최초로 임원까지 오른 호텔신라 중식당 ‘팔선’의 후덕죽 상무다.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뒤인 1998년 3월 청와대 조리실 막내이자 최연소 요리사가 됐다. 31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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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입맛 사로잡은 손맛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적인 음식을 주로 찾았는데 막회를 특히 좋아했다. 국밥, 김치찌개, 해물파전, 추어탕, 막된장을 곁들인 쌈밥도 즐겼고 비 오는 날이면 파전에 막걸리를 곁들였다. “된장찌개나 추어탕에 방앗잎 등 향신료를 넣어 드리면 아주 좋아했어요. 동네 이장 같아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편했답니다. 지방을 돌 때도 청와대 직원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네요.”
이명박 대통령 시절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웠던 때라 찾는 음식 폭이 넓지 않았다. 테니스를 한 뒤 바비큐 파티를 많이 했고 손님이 없을 때는 간단하게 먹는 걸 즐겨서 설렁탕, 국밥, 사골 얼갈이탕, 비빔밥을 주로 주문했다. “몸이 안 좋을 때는 돌솥에 지은 하얀 쌀밥에 계란 하나 풀고 간장만 넣어 드시곤 했어요. 그게 자신의 보양식이라 이렇게 먹으면 늘 힘이 난다고 해요. 음식 남기는 걸 아주 싫어했죠.”
박근혜 대통령은 음식 폭이 넓었다. 식사량은 적었지만 샤부샤부, 복사시미 등 못 먹는 음식이 없었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양곰탕을 즐겼다. 다만 밀가루 음식은 소화가 잘 안 돼 짜장면도 메밀로 만들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혼밥’을 먹기 일쑤였단다.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겸상하지 않고 혼자 식사했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같이 밥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부모를 총탄에 잃고 청와대를 나가 18년 동안 혼자 밥을 먹다 보니 거기에 적응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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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시간과의 싸움
청와대 조리실은 천 셰프에게 고향과 비슷하다. 다시 청와대 셰프직을 제안받으면 수락할까. “사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에도 제의를 받았어요. 총괄조리팀장보다 직급이 높은 관리자직이었는데 고민 끝에 고사했어요. 청와대에서 나온 뒤 제 식당을 차리고 자리 잡기까지 4~5년이 걸렸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청와대에 들어간다는 게 무모해 보였죠. 열정으로 가득 찼던 젊을 때는 힘든 줄 모르고 일했지만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라 그때만큼 잘할 자신도 없더군요.”
‘탄핵’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청와대에서 두 차례(노무현·박근혜) 탄핵 정국을 지켜봤다. 지금 사태를 어떻게 볼까. “더 이상 그런 사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 차례나 경험하고도 같은 역사가 반복되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네요. 다만 청와대 조리실 직원들은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없어요. 대통령과 청와대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 때 채용된 한 셰프가 탄핵 뒤 청와대를 나가 자기 식당을 차렸는데 주위 눈치 탓에 청와대 요리사 출신이란 간판을 내걸지도 못했어요.”
그는 최근 후배 셰프 양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데 ‘천상현의 천상 가평멋집’에서 일하는 제자 윤석민 조리사가 제18회 이금기 요리대회 프로부에서 은상을 차지했다. 셰프를 직업으로 삼으려는 후배들에게 천 셰프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요즘 요리하려는 후배들을 보면 너무 급해요. 1년만 열심히 하면 스타 셰프가 되는 줄 알고 요리를 공부할 때 최대한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해요. 요리가 1~5단계라면 모두 배워야 합니다. 몇 단계 건너뛰고도 편법으로 요리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기본을 다지지 않은 요리는 얼마 못 가 손님에게 들통나기 마련이에요. 젊을 때 특정 요리를 편식하지 말고 한식, 중식, 양식 경험을 모두 쌓으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7~8년 이것저것 다 연마하면 자기만의 독특한 요리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천상현 셰프는…
●1968년 전남 영암 출생 ●동도고·명지실업전문대 토목학과 졸업·경기대학교 관광전문대학원 외식산업경영학과 석사 ●대통령 전담요리사(1998년 3월∼2018년 7월) ●세계요리대회 심사위원 ●대한민국 국제요리 경연대회 심사위원 ●대한민국 최초 전 세계 대통령수석셰프모임 정회원 ●국제 한식조리학교 객원교수 ●경희사이버대학교 외식조리경영 학과 겸임교수(2021∼)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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