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 AP 연합뉴스 |
재임 중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반인도범죄 혐의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로드리고 두테르테(79) 전 필리핀 대통령이 체포됐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정부가 공항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발부한 체포영장을 전격 집행했는데, 필리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11일 홍콩에서 막 귀국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마닐라국제공항에서 체포했다고 밝혔다. 필리핀 정부는 성명을 내어 “검찰총장이 그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제형사재판소 체포영장을 제시했다”며 “그는 현재 당국이 구금 중이다”고 밝혔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어디에 구금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민다나오섬 다바오의 시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11월부터 그가 주도한 마약범 대규모 단속 과정에서 일어난 용의자 사살 등을 반인도 범죄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2016년 6월~2022년 6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필리핀 전역에서 대규모 마약 용의자 체포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적법하지 않은 용의자 체포 및 사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으며, 이로 인한 사망자가 수만명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두테르테 치하에서 벌어진 마약단속과 관련한 살인혐의는 필리핀 국내에서도 제기돼, 9명의 경찰들이 유죄 평결을 받았다. 두테르테는 경찰관들에게 단속 과정에서 생명이 위험하면 용의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런 단속들이 가족들을 구하고, 필리핀을 마약과 정치가 결합한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테르테는 스스로를 살인자로 칭하며 경찰들을 독려했다. 그는 지난 10월 상원의 마약전쟁 조사 개회식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도 변명도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것을 했고, 당신들이 그것을 믿던 안 믿던, 나는 내 조국을 위해 그것을 했다”고 주장했다.
두테르테 재임 중인 2019년 필리핀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탈퇴했다. 퇴임 전인 2021년 말 필리핀 당국은 이미 똑같은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며 국제형사재판소가 사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 재판소의 수사를 다시 피하려고도 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지난 2023년에 두테르테 쪽의 이런 주장을 기각하고, 수사 재개를 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는 대량학살,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등 극악한 국제범죄의 용의자를 해당 국가가 소추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개입할 수 있다.
두테르테에 이어 필리핀 대통령에 2022년 6월 취임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필리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다시 가입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인터폴에 두테르테를 구금시키라고 명령하면 재판소에 협력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리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최근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반인도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국제경찰인 인터폴의 마닐라 지부가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을 수령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 딸인 사라 두테르테와 러닝 메이트를 이뤄 출마해 당선됐으나, 두 가문의 관계는 최근 극도로 악화됐다. 사라 부통령은 지난해 11월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구체적인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며 마르코스 대통령을 암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라 부통령은 “이미 내 경호팀에게 얘기했다”며 만약 내가 살해당하면 마르코스 대통령 등을 죽이라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홍콩에서 귀국하기 앞서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알고는, 이를 피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귀국했다. 그는 이날 해외로 오가는 필리핀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사관에게 욕설하며 수사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체포가 자신의 운명이라면 받아들 것이라고 말했다.
체포된 공항에서는 두테르테 지지자들이 몰려나와 격렬히 항의했다. 봉 고 상원의원은 “이는 두테르테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침해”아고 비판했다. 필리핀에서 두테르테는 전 대통령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내세워 대통령에 올랐고 재임 시에도 상당한 지지를 모았다. 두테르테는 오는 5월에 치러지는 중간선거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다바오에서 시장으로 재출마할 계획이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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