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달집태우기' 모티브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 프로젝트 마무리
"한국 민속의식 현대미술로 재해석…한국작가 정체성 분명한 작업하고파"
"한국 민속의식 현대미술로 재해석…한국작가 정체성 분명한 작업하고파"
공중에서 바라본 달집의 모습. 청도천의 섬 전체를 이배 작가의 '붓질' 작업이 인쇄된 천으로 덮었다.[조현화랑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청도=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정월대보름이었던 지난 12일 경북 청도군의 하천인 청도천의 하중도(하천에 있는 섬). 약 3천평 규모의 섬 전체에 너비 200m, 폭 35m의 장대한 붓질이 담긴 흰 천이 덮였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오후 5시, 미술계 관계자들과 청도 주민 등이 입을 모아 셋을 외치자 이배 작가가 흰색 버튼을 눌렀다. 흰 천으로 덮인 섬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 조금씩 불길이 섬을 뒤덮기 시작했다. 1년에 걸친 이배 작가의 '달집태우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이배 작가의 '달집태우기' |
달집태우기는 솔가지와 볏짚 등을 쌓아 만든 원추형 '달(月)의 집'인 달집을 태우며 액운을 떨치고 가족과 이웃의 안녕과 화합을 비는 정월대보름 민속행사다.
특히 달집태우기 행사가 유명한 청도에서 자란 이배 작가는 고향의 행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프로젝트를 1년 전 정월대보름에 이곳에서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소원을 한지에 먹으로 옮겨 쓴 뒤 달집에 매달아 불을 붙였다.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활활 타오르다 다음날 숯만 남는 과정은 '버닝'(Burning)이라는 제목의 영상에 담겼다. 이 영상은 지난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 베네치아에서 열린 공식 병행전시 '달집태우기' 전시장 입구에서 전시됐다. 전시장 바닥과 벽면을 덮은 도배지에는 남은 숯을 도료 삼아 그린 힘찬 '붓질'이 지나갔고 전시장 출구에는 청도의 달빛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빛의 공간이 마련됐다.
달집태우기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이배 작가 |
베네치아 전시를 마친 작가는 이날 다시 같은 장소에서 볏짚과 소나무 가지, 다양한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한지, 전시 때 '붓질' 작품을 그렸던 도배지 등으로 구성된 또 다른 달집을 태우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청도에서 만난 작가는 베네치아 전시 제목을 '달집태우기'로 정한 데 대해 "한국의 민속 의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내 나름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며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시대에 한국 작가로서 우리의 전통이나 역사, 문화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배 작가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 '달집태우기' 전시 모습[연합뉴스 자료사진] |
작가는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순환'"이라며 "지난해 달집을 태우고 그 영상과 타고 남은 숯으로 베네치아에서 전시한 뒤 다시 청도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환'으로 이번에 달집을 태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달집을 전통 방식대로 수직으로 세웠지만 올해는 섬 전체를 천으로 길게 덮고 그 아래 볏짚과 소나무 가지,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한지, 베네치아 전시 때 '붓질' 작품을 그렸던 도배지 등을 넣어 수평의 '달집'을 만들었다. 베네치아와 한국을 잇는 길을 표현하는 동시에 뱀의 해를 맞아 뱀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달집은 마치 거대한 대지미술 작품 같았다.
캔버스 위에 절단한 숯 조각을 빽빽하게 놓고 접합한 뒤 표면을 연마한 '불로부터'(Issu de feu),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다양한 형태의 붓질 그대로를 보여주는 '붓질'(Brushstroke) 등 숯을 이용한 작업으로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 작가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됐다.
정월대보름인 12일 경북 청도에서 이배 작가의 '달집태우기'가 진행되는 모습[조현화랑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작가는 "숯은 불로부터 오는 것이라 태우는 것은 내게는 소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생성의 의미가 더 강하다"면서 "또 정월대보름에 무엇인가를 태우는 것은 과거의 시간이 어떻든 모두 태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번 프로젝트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영상 작업을 해봤고 높이 5m 정도의 검은 화강석으로 먹을 만드는 작업도 해봤죠. 또 이전까지는 혼자서 작업했다면 베네치아 전시를 통해 많은 사람과 일하면서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들 수 있는 작업의 길이 열렸어요. 무엇보다 자라면서 눈에 익숙했던 고향의 전통 의식을 현대 미술 작가로서 베네치아에서 전시했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도 큰 출발점이 됐어요. 앞으로 한국 작가 정체성이 분명한 현대미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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