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에 만나는 뮤지컬 ‘그해 여름’
영화의 동화 같은 사랑이 소박한 무대 위로
뮤지컬 ‘그해 여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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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69년 여름, 석영의 매일은 무료하다. 삼선개헌 반대 투쟁으로 시대는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내도 석영은 세파엔 무심하다. 그 시절의 ‘금수저’, 모두가 선망하는 ‘엄친아’인 석영에겐 모든 것이 시큰둥할 뿐이다. 그러다 맞은 대학생활의 다섯 번째 방학. 그 여름, 석영의 따분한 날들에 첫사랑이 스민다.
겨울의 한복판에 ‘그 여름’을 다시 만난다. 2006년 초겨울, 아련한 첫사랑을 안고 왔던 영화 ‘그해 여름’이 2025년 한겨울의 대학로를 찾아왔다. 동명의 원작 영화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 ‘그해 여름’(3월 2까지, 서경스퀘어). ‘시간의 간극’을 세심히 이어붙인 무대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닿지 않을 것 같은 여름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영화 ‘그해 여름’ [쇼박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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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예고 없이 날아든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 지구 반대편에선 인류가 달 표면에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가 딛고선 땅에선 ‘빨갱이 척결’에 한창이었다. 사랑은 일상을 전복하는 시대의 비극과 함께 왔다.
뮤지컬 ‘그해 여름’은 이병헌 수애 주연의 동명 영화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킹덤’(넷플릭스), ‘악귀’(SBS), ‘시그널’(tvN) 등 K-장르물 시대를 연 스타 작가 김은희의 데뷔작이다. 창작진은 2019년 ‘그해 여름’과 처음 만나, 오랜 시간 개발 과정을 거쳐 2025년 버전의 뮤지컬로 다시 만들었다. 17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선정작이다.
뮤지컬 ‘그해 여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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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은 2006년 개봉 당시 29만 관객을 동원한 멜로물이다. 일찌감치 ‘무비컬’(무비+뮤지컬)이라는 용어도 만들어질 만큼 영화 원작 뮤지컬은 흔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대화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중심 스토리가 탄탄히 자리하나, 영화를 매만지는 두 요소는 다른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싱그러운 여름 풍경과 두 배우의 연기가 그것이다. ‘그해 여름’은 내내 눈으로 말하는 영화였다. 대사와 스토리 이전에 풋풋한 젊음에게 찾아오는 첫사랑의 설렘과 절망을 새긴 이별의 감정이 서로의 눈을 통해 전달된다.
‘흥행작’의 무게가 뻔히 보임에도 영화를 원작으로 삼는 데엔 이유가 있다. 2시간 안팎의 길이로 뮤지컬과 호흡이 비슷해 각색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어서다. 게다가 탄탄한 각본을 무대로 옮겨왔을 때 기존 흥행작의 수혜도 기대할 수 있다. 대신 영상의 문법과는 다른 뮤지컬만의 새로운 극적 구조와 무대 연출이 바탕해야 관객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 ‘그해 여름’은 약 20년 전 작품임을 감안해도 지극히 전형적인 이야기 전개, 시대의 비극과 만난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클리셰, 심심하리 만치 잔잔한 스토리라는 최약점을 안고 있다.
“진짜를 만나면 그동안 그것을 몰랐던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이 낭만으로 남을 수 없던 날들, 시대의 불행에 개인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간을 딛고 견딘 사랑의 이야기다.
뮤지컬 ‘그해 여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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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 잎은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다.” vs “풍경 소리는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다.”
레코드 가게 앞 커다란 창에 귀를 대고 앉은 두 사람. 로이 클라크의 ‘예스터데이 웬 아이 워즈 영(Yesterday When I Was Young)’이 흐르고, 둘은 ‘편백나무 잎은 사랑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나지막히 읊조린다. 청년 이병헌의 눈빛에 첫사랑이 찾아오고, 수애의 말간 얼굴은 문득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놀란다.
영화 ‘그해 여름’의 명장면이자 명대사다. 원작을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창작진이 가장 고심했을 장면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음악을 새로 입혀야 하는 뮤지컬은 영화의 상징이 된 ‘편백나무’를 ‘풍경소리’로 재치있게 치환한다. 동선과 공간의 시각화에 제약이 있는 뮤지컬에선 영화와 달리 석영이 풍경소리에 이끌려 정인의 도서관을 찾게 되는 장면으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그린다. 이후 ‘풍경소리’는 기존의 대사를 바꿔 석영과 정인의 서사를 쌓는다.
정서와 분위기가 지배적인 영화의 무대화를 위해 뮤지컬은 사소해보이는 영화 속 디테일을 보완하고 강조했다. 무대와 객석의 물리적 거리는 섬세한 감정 연기를 보여주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컬이 집중한 것은 상황 중심의 장면과 개연성 있는 전개, 극적 설정의 강약조절이다.
뮤지컬 ‘그해 여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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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이지만 기존 작품과 달리 ‘그해 여름’은 스토리 전달을 위한 대사의 지분이 큰 작품이다. 대신 곳곳에 감초처럼 자리한 음악이 뮤지컬의 매력을 살렸다. 영화를 아름답게 물들인 팝송 대신 스윙, 재즈, 올드팝 등 1930~40년대 다양한 장르를 입혀 ‘그해 여름’의 전형적 이야기에 색다른 미감을 더했다. 음악과 더해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 ‘라라랜드’를 연상케 한다.
극적으로 치닫는 장면은 중반부 이후 나온다. 내내 잔잔한 이야기는 이장댁 아들이 감전사고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서관이 불타는 순간을 그릴 때 전환점을 맞는다. 정인을 ‘빨갱이 자식’이라며 무섭게 몰아치는 시대의 비극, 연좌제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삶을 사는 정인, 그런 정인을 바라보는 석영의 아픔이 어우러져 세 배우가 화음을 이룬다. 꾹꾹 눌러온 그간의 감정이 파고가 되는 장면이다. 극 후반부 석영과 정인이 시위 현장에서 잡혀가고, ‘살아남기 위해’ 시대에 굴복하고 처절한 아픔을 삼켜야 하는 대목까지 연결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작품의 의도와 관객의 감정 사이 온도차는 컸다. 110분의 러닝타임 동안 사랑에 빠지고, 정인의 아픔이 드러나고, 시대에 내몰리다 마을을 떠나 다시 서울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서로를 위해 이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와 감정이 전달하는 괴리는 1969년과 2025년의 시간차 만큼이나 컸다. 단조로운 극적 구조, 여러 콘텐츠를 통해 익히 봐왔던 스토리는 소극장 뮤지컬 무대의 제약을 넘기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객석을 설득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명장면은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진 물가를 건너와 수내리의 정취를 바라보는 두 청춘의 뒤로 파란 하늘 같은 시내가 펼쳐진다. 육각형 조명으로 만들어낸 윤슬이 청춘의 사랑처럼, 사라지지 않을 동화처럼 반짝인다. 그날의 여름이 2025년의 겨울에 남기고 간 ‘최고의 1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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