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 나이 듦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흐름이 거세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는 국내 안티에이징(항노화) 화장품 시장 규모가 지난해 4조원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저속노화(천천히 나이 듦)’라는 단어가 퍼지면서 건강기능식품부터 가전제품까지 아우르는 10조원대 시장이 주목받는다.
저속노화는 안티에이징이란 용어가 식상해질 무렵 등장한 대체어다. 정제 곡물이나 단순당 섭취를 줄이는 식습관, 충분한 수면과 운동처럼 천천히 나이 드는 생활 습관을 과학적 근거로 내세운다. 저속노화를 주장하는 학계 전문가들은 생물학적인 나이는 뒤엎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단지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을 바꾸면 노화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속노화를 추종하는 일부 기업들은 이 기회에 편승해 한몫 챙기기에 나섰다. 글로벌 화장품 업체 A사는 ‘세포 시계를 되돌린다’며 3세트에 500만원대를 웃도는 제품을 내놨다. 국내 건기식 기업 B사는 ‘유전자 수준 노화 억제’를 내세워 월 50만원이 넘는 제품을 판다. 미용기기 업체 C사는 ‘줄기세포 활성화’란 문구로 1대에 150만원이 넘는 마사지기를 홍보한다.
해외도 다르지 않다. 미국의 한 바이오 스타트업은 ‘혈액 교체로 젊어진다’며 10만달러(약 1500만원)짜리 시술을 판매했다가 FDA 제재를 받았다. 영국에선 노화방지 주사를 표방한 제품이 피부 피로도를 높인다는 부작용 논란에 휘말렸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한다. 하버드대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팀은 네이처지 논문을 통해 “노화 속도를 조절할 순 있어도 완전히 늦추거나 멈출 순 없다”고 했다. 도쿄대 노화연구소 미조구치 히데야 소장은 “건강한 노화야말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했다.
소비자 피해도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기준 국내 60대 이상의 한 달 평균 화장품·건기식 지출액은 35만원으로, 5년 전보다 두 배 늘었다. 미국 소비자보호원은 2023년 노화 방지 제품 관련 피해 사례가 직전 해보다 40%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미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 르몽드는 ‘나이 듦의 미학’을 강조하며 안티에이징 마케팅을 비판했다. 일본 미용 브랜드 시세이도는 최근 ‘나이답게, 아름답게’란 슬로건으로 브랜드 방향을 전환했다. 영국 가디언은 ‘안티에이징의 종말’이란 기사에서 항노화 대신 웰에이징을 조명했다.
저속 노화처럼 노화를 피해야 할 질병처럼 보는 시각이 노인 차별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프랑스 노년학자 크리스티앙 갈레 교수는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일수록 노인 소외가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이 듦을 부정하고 막으려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유통업계도 젊음 유지만이 아닌 나이 듦을 함께 말해야 한다. 단지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닌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에 제품과 서비스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유진우 기자(oj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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