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2.15 (토)

“방금 팔았습니다” 최태원 한마디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HBM 이어 ‘유리기판’도 SK가 선점


“방금 팔고 왔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말 한마디에 계열사 SKC 주가가 요동쳤다. 최 회장은 지난 1월 8일(현지 시간) SK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SKC가 만든 ‘유리기판(Glass Substrate)’ 모형을 들어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SKC 주가는 1월 8일 13만5400원에서 1월 9일 16만1600원으로 20% 가까이 뛰었다. 이후 소폭 조정됐지만 여전히 15만~16만원대를 유지 중이다.

유리기판이 뭐길래 시장에서 엄청난 호재로 판단한 걸까. 유리기판은 인공지능(AI) 시대와 맞물려 게임 체인저로 부상한 분야다. 전자부품 업체가 앞다퉈 관련 사업에 뛰어들고 있을 정도다. 그간 유리기판 개발을 주도해온 SKC와 인텔은 물론이고 삼성전기와 LG이노텍도 참전했다. 최 회장 말대로 판매가 확정됐다면, 일단 SKC가 선점하는 분위기다. 최 회장은 SK 전시관 방문 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엔비디아에 유리기판을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매경이코노미

SKC의 유리기판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SK 전시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DC) 구역에 전시돼 있다. (SKC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게임 체인저’ 유리기판

‘열’ ‘면적’ 한계 넘어서

현재 반도체를 패키징하는 기판의 핵심 키워드는 ‘FC-BGA(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 기판’과 ‘인터포저(Interposer)’다. 일반적으로 전자기기를 뜯어보면 나오는 초록색 판이 기판이다. 진짜 이름은 인쇄회로기판. 영어로는 Printed Circuit Board다. 전기 신호가 지나가는 회로가 인쇄된 보드로 직역할 수 있다. 기판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중개업자다. 반도체 칩과 전자기기 속 메인보드를 연결한다. 반도체 칩의 전기 신호 통로 간격은 상당히 미세하다. 메인보드 통로 간격과 차이가 크다. 이에 기판은 반도체 칩 통로에 맞게 전기 신호를 받고 이를 메인보드에 맞춰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작동 중 발생하는 열을 효과적으로 분산해 칩의 온도를 관리하는 등 반도체 칩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AI 반도체 시대가 개막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반도체 칩 통로가 늘면서 간격이 더 좁아진 것. 기판 홀로 감당할 수준이 아닌 상황이 됐다. 결국 기판은 일부 업무를 하청에 맡긴다. 이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인터포저다. 인터포저는 까다로운 고객 반도체 칩과 마주하며 전기 신호를 받아들인다. 그러곤 기판 수준에 맞춰 이를 전달한다. 인터포저는 보통 유기(Organic)와 실리콘(Si) 소재가 쓰인다. 다만 실리콘 소재가 워낙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주로 유기 소재를 활용한다. 하지만 사공이 많아지고, 유통 과정이 복잡해지면 문제가 생기는 법. 인터포저 탓에 기판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다.

유기 인터포저는 기술적 한계를 갖고 있다.

일단 열에 약하다. 기판 위에 붙어 있는 인터포저가 열에 약하다 보니 기판도 함께 휘는 현상인 워피지(Warpage)가 잦아졌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AI 반도체 시대와 함께 데이터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만큼 발열은 커질 수밖에 없는데, 열에 약하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또 다른 문제는 면적이다. 고성능 칩일수록 사이즈가 커지는 만큼 기판도 대면적화가 이뤄진다. 문제는 현재 유기 인터포저의 경우 분명한 사이즈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평탄도 역시 고르지 못해 회로 설계 미세화에 적합하지 않다. 기판이 믿고 일을 맡기기에는 수많은 리스크가 존재하는 셈이다. 반도체 업계는 2030년부터 유기 소재 기판이 트랜지스터 수 확장 흐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해법이 필요한 상황. 소재 업체들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유리기판’이다. 유리기판은 상대적으로 열에 강하고, 평탄도 역시 고른 편이다. LS증권이 펜실베이니아주립대(펜스테이트) 자료를 인용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유기 인터포저 기반 기판의 열팽창계수는 3~17ppm/K이다. 반면 유리기판 열팽창계수는 3~9ppm/K이다. 최대치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또 표면의 거칠기도 유기 소재는 400~600㎚ 수준인 반면 유리기판은 10㎚ 이하다. 덕분에 유리기판은 인터포저 없이도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있다. 인터포저가 없다 보니 대면적화도 용이하고 기판 두께도 약 25% 줄일 수 있다. 유기 인터포저 기반의 FC-BGA 기판 로드맵은 2026년 100㎜×100㎜ 정도다. 반면 조지아공과대(조지아테크) 등이 내놓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리기판은 300㎜×300㎜ 크기까지 구현 가능할 전망이다. 기판이 필요한 기업들 입장에선 성능은 개선하고 면적당 비용은 줄일 수 있는 기회다.

앞선 SK, 뒤좇는 삼성·LG

SKC, 이르면 올해 말 양산 개시

주요 빅테크는 ‘유리기판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대표적인 곳이 AMD다. 지난해부터 유리기판을 자사 칩에 적용하기 위해 국내외 협력사와 논의했다. 이미 다수의 시제품 테스트도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IT 전문매체 테크스팟과 탐스하드웨어 등에 따르면 AMD는 최근 유리기판을 활용한 멀티 칩렛 프로세서 관련 특허도 확보했다. 주문형반도체(ASIC) 시장을 이끄는 브로드컴도 유리기판 도입을 검토 중이다. 기술 도입 초기 단계로 성능 평가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업계는 엔비디아 역시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AMD와 브로드컴은 모두 엔비디아와 대척점에 선 기업이다. 최근 최태원 회장이 젠슨 황을 만난 뒤 “(유리기판을) 방금 팔고 왔어”라고 말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 도입 준비를 시작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큰손들이 움직이자 국내 주요 소재 업체들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장 앞서 있는 기업은 SKC다. SKC는 2021년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유리기판 합작사 앱솔릭스를 설립했다. 지난해 상반기 미국 조지아주 커빙턴시에 1공장을 건설했다. 세계 최초 유리기판 상업화 공장이다. 조지아1공장은 2022년 11월 착공, 2억4000만달러가 투입됐다. 연간 1만2000㎡ 규모 유리기판 생산능력을 갖췄다. 김성진 앱솔릭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최근 CES 2025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재 본격적인 양산에 앞서 고객과 품질 검증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며 “고객 수요는 앱솔릭스의 생산능력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규모만 보면 조지아1공장은 소규모 생산시설(SVM)이다. 앱솔릭스는 대량 양산을 위해 7만2000㎡ 규모 조지아2공장 설립도 추진 중이다. 관련 업계는 SKC가 AMD의 유리기판 도입 시점에 맞춰 양산을 추진할 것으로 본다. AMD는 이르면 2025년 늦어도 2026년 유리기판을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삼성전기는 공식적으로 2027년을 양산 목표 시점으로 정했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CES 2025 기자간담회에서 “유리기판의 경우 특정 고객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고객과 협의하고 있다”며 “올해 2~3개 고객에 대해 샘플을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027년 이후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기는 지난해를 기점으로 유리기판 사업을 본격화, 세종사업장에 유리기판 파일럿 라인(시범 생산라인)만 구축한 상태다. LG이노텍도 한발을 걸쳐놨다. 문혁수 LG이노텍 대표는 지난해 3월 21일 주주총회 직후 “주요 고객이 미국의 큰 반도체 회사인데 유리기판에 관심이 많다”며 “당연히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양산 시점 등은 밝히지 않았지만, 올해 세부 계획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증권가도 3사 중 SKC에 가장 주목하는 분위기다. 박진수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하반기 대규모 양산 체제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경쟁사 대비 상업화 시점이 가장 빠르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4호 (2025.01.22~2025.02.04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