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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부 ‘쫑알’ 쓰는 마음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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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부 ‘쫑알’ 쓰는 마음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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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 초등교사·동화작가



학기말이 되면 ‘쫑알’을 다 끝낸 선생님이 제일 부럽다. ‘쫑알’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재하는 서술문을 초등교사들끼리 이르는 말이다. ‘교과학습 발달사항’ 항목은 ‘과목 쫑알’로,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그냥 ‘쫑알’이라 한다. ‘창의적 체험활동 상황’도 서술문으로 입력하지만 학생의 활동에 따라 들어가야 할 내용이 정해져 있어서 굳이 ‘쫑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쫑알’은 교사가 학생의 학교생활을 1년 동안 관찰하고 평가한 내용을 정련된 언어로 서술한 문장을 말하는 셈이다. 예전에 10년 정도 쓴 외장하드가 갑자기 고장 나서 버린 적이 있는데, 그 안에 든 것 중 가장 아쉬웠던 자료가 10년치 누적 ‘쫑알’이었다. 그동안 가르친 각양각색의 학생들을 정확하고 따뜻하게 설명하는 표현들을 10년 동안 레고 블록처럼 분해했다 재조합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발전시킨 문장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선생님이 자신만의 ‘쫑알’ 데이터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쫑알’ 쓰기는 늘 조심스럽다. 1년간 교사 한 사람이 십수명의 학생을 평가하다 보면 아무리 꼼꼼히 관찰한다 해도 학생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쫑알’을 쓸 때면 학생의 성격, 생활 태도, 규칙 준수, 정리정돈, 식습관, 교우 관계, 독서 습관, 교과별 흥미와 성취도, 특히 재능 있는 영역 등 넣을 수 있는 모든 항목을 살펴보고 그중에 학생이 특별히 잘하거나 칭찬하고 싶은 것 위주로 골라 쓴다. 겹치거나 비슷한 특징은 묶고, ‘매우’, ‘항상’ 같은 과한 표현이나 부사는 최대한 빼고,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면들부터 쓴다.



모든 학생이 완벽하지 않고 유난히 단점이 도드라지는 학생도 있다. 단점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평소에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단점이 남에게 피해를 줄 때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알리고 개선하는 것이 앞으로 학생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과 부정적인 평가에 마음 상하여 교사를 원망하거나 민원을 넣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팽팽히 맞선다. 사실 후자가 훨씬 더 현실성 있는 이야기다. 2000년대 후반에는 ‘쫑알’에 학생들이 개선해야 할 점을 한두 문장 쓰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10년쯤 전부터 학생에게 어떤 점이 부족하다거나 어떤 점을 고치면 좋겠다는 말 자체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고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사춘기가 와서 1년 동안 반항적인 태도로 생활했던 학생에 대해 ‘규칙을 지키고 배려심을 기르기 바란다’는 문장을 넣었다가 연구부장님으로부터 그 문장을 빼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전 학년에서는 부정적인 피드백이 없었던 거로 보아서 원래 그런 학생은 아닌 것 같으니 그 말을 빼달라는 것이다. 담임인 나도 여러번 고민한 끝에 넣은 문장이었는데 결국 뺐다.



생기부의 ‘쫑알’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쫑알’ 문장은 ‘사려 깊게 행동하며 끈기가 있음’이라고 써야 한다. 누가 썼는지는 문장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교사의 고유 권한인 생기부 작성과 ‘쫑알’에 학생과 학부모, 관리자와 교육청이 모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학생의 성장 과정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을 들어내면, 그 자리엔 듣기 좋은 애매한 말들이 들어가게 된다.



얼마 전 한 의대 컨설팅 학원에서 의대 재학 중인 학생의 생기부를 사들인다는 뉴스를 보았다. 생기부의 내용은 그 학생이 가진 좋은 품성으로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공문서인 생기부를 통째로 사고파는 행위는 해마다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의 ‘쫑알’을 쓰는 교사들의 노력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한명의 학생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여러 선생님들은 자신이 가진 ‘쫑알’ 사전에서 최상의 단어들만 골라 학생의 생기부를 채웠을 것이다. 생기부에는 주어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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