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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둠 속에 있습니까?’ [배철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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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둠 속에 있습니까?’ [배철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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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을 그린 화가, 카라바조’


이번 호부터 배철현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 ‘배철현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배철현 전 교수는 고대 오리엔트 문자와 문명을 전공한 고전문헌학자로,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그 이전 문명과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미래혁신학교 ‘건명원’의 창립자 중 한 명이며,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심연’ ‘수련’ 등이 있습니다.

여기 복숭아 껍질을 집중하고 벗기는 소년이 있다. 그는 짙은 갈색으로 빛바랜 복숭아를 깎고 있다. 앞에 있는 복숭아는 아직도 분홍색과 붉은색을 띠고 있지만, 그가 껍질을 벗기고 있는 복숭아는 시듦을 상징하는 깊은 갈색이다. 오른손에 든 칼끝이 시계 방향으로 나선형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껍질 사이로 날카롭게 비쭉 나와 있다. 그는 이 작업에 온전히 집중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쌍꺼풀진 두 눈은 복숭아를 간신히 볼 정도로 지그시 감았다. 집중하니 입은 저절로 오므려진다. 왼쪽 입술 부분이 더 두툼하게 올라왔다. 그는 과일을 깎기 위해 최적화된 옷을 입었다. 느슨한 아마포 옷은 16세기 말, 로마 청소년에게 인기 있던 최신 유행 셔츠였을 것이다. 이 느슨한 흰색 셔츠의 중앙은 명치까지 V자로 깊이 파여 있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 유화, 1593년, 68×62.5㎝, 로마 폰다치오네 로베르토 롱기 보유.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 유화, 1593년, 68×62.5㎝, 로마 폰다치오네 로베르토 롱기 보유.


그는 식탁 위에 올려진 복숭아 껍질을 정성스럽게 벗기기 위해,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 식탁과 의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을 감상하려는 여러분과 내가 상상을 동원해 채워 넣어야 할 소품이다. 그는 치렁치렁한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렸다. 최대한 몰입하기 위해 과일을 담고 있던, 가는 가지를 엮어 만든 바구니를 뒤엎어 과도를 들고 있는 오른팔을 살포시 올려놨다. 바구니에 쏟아져 나온 솔방울과 복숭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과일을 잡고 있는 왼손이 과도를 잡고 있는 오른손에 비해 커 보인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과도가 효율적으로 껍질을 벗기도록 적당하게 잡고 있다. 오른손 엄지는 복숭아 뒷부분을 밀고 있고 오른손 나머지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밀고 쥐고 있는 과도는 그의 의도대로 복숭아 살을 파고 들어갔다. 껍질이 마치 우리 은하계가 빅뱅으로 탄생할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나선형 모형으로 튕겨 나가고 있다.

이 그림은 이제 막 화가로서 인생을 시작한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1571~1610년)의 첫 번째 작품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다.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라는, 도시의 장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카라바조에서 1571년 9월 29일에 태어났다. 카라바조 동네 출신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 동네 이름인 ‘카라바조’로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밀라노를 다스리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자 1세의 건물을 장식하고 관리하는 ‘무라토레’, 즉 벽돌공이었다. 어머니 루치아 아나토리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카라바조는 난폭하고 다혈질의 성격으로 종종 범죄를 저질러 일생 동안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외가 쪽 귀족들이 그가 출소할 수 있게 해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역병으로 죽었고 그의 가족 후원자였던 스포르자 1세도 1583년에 사망하면서 그는 어려서부터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카라바조의 어머니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친척 콜로나 가문 추천을 받아 카라바조를 밀라노 유명 화가인 시네모 페테르짜노의 문하생으로 밀어넣는다. 페테르짜노는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던 소위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 방식인 ‘매너리즘’에 반기를 들고 자신이 표현하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실감 나게 표현하는 사실주의 화가였다. ‘매너리즘’이란 1520년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풍미한 미술 양식. 표현의 대상을 지적이면서도 인공적으로 묘사했다. 카라바조는 첫 번째 스승인 페테르짜노를 통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는 자연주의를 섭렵했다.


카라바조 초상화, 화가 오타비오 레이니(1578~1630년), 색채화, 1621년, 피렌체 비블리오테커 마루첼리아나 소장.

카라바조 초상화, 화가 오타비오 레이니(1578~1630년), 색채화, 1621년, 피렌체 비블리오테커 마루첼리아나 소장.


카라바조는 4년 동안 페테르짜노 문하에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화풍을 연습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1595년, 그가 24세가 됐을 때,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경찰과 시비가 붙어 칼로 찌른 후, 유럽 집시들이 몰려들어 익명성이 보장되는 로마로 도망한다. 우연이지만 운명적으로 예술의 중심지인 로마에 간 것이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돈이 한 푼도 없었고 그를 도와줄 친척도 없고 집도 없고 또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동안 정처 없이 집시처럼 돌아다니던 카라바조는 이후 판돌포 푸치라는 화가의 집에 머물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푸치 밑에서 다른 화가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습작 작업을 한다. 푸치가 연습생들에게 준 음식은 샐러드밖에 없었다. 카라바조는 그를 ‘몬시뇰 샐러드’ 즉 ‘샐러드만 주는 꼰대’라고 불렀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1593년)’은 카바라조가 푸치의 집을 떠나 저명한 화가 주세페 체사리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점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곳에서 주로 ‘꽃과 과일’을 그리는 정물화에 집중했다. 오늘날 적어도 4년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아주 유사한 그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봐, 당시 로마에서 잘 팔리는 정물화였을 것이다.

이 소년은 마치 연극 무대에 홀로 앉아 있는 배우와 같다. 배경은 온통 암흑이고 강렬한 조명이 왼편에서 사선으로 그의 얼굴, 몸, 특히 손을 비추고 있다. 그 조명이 강렬해 얼굴 왼편은 그림자로 그늘졌다. 그의 구겨진 셔츠도 조명을 받는 부분은 흰색으로 빛나지만, 굴곡진 부분에는 다양하게 어둠이 깃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과 특히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 그림과는 달리 배경이 암흑이고 혼돈이다. 빛은 바로 혼돈이 낳은 자식이다.


카라바조가 읽고 또 읽었을 구약성서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3절은 다음과 같다.

“신의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할 때, 땅은 비어 있고 형태가 없었으며, 어둠이 깊은 위에 있고, 강력한 바람이 물을 억누르고 있었을 때, 신이 ‘빛이 생겨라!’ 말하니 빛이 생겼다.”

카라바조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 뒤러와 같은 화가들이 이미 실험하고 있는 소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즉 명암을 통해 그 대상의 심리를 표현하려는 화법을 완성했다. 키아로스쿠로는 ‘밝음’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와 ‘어둠’을 의미하는 ‘스쿠로’의 합성어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로 묘사하려는 대상을 평면이 아니라 그림자로 드러난 삼차원으로 표현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건축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한 선형원근법에 의거해 대상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반면 카라바조는 이 방식을 폐기한다. 그는 자신이 묘사하려는 대상에만 강렬한 빛을 발사한다. 그 대상은 마치 연극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받고 있는 배우와 같다.


카라바조에게 삶은 어둠이며 예술은 빛이었다. 그에게 삶은 이탈리아어로 ‘소토보스코(sottobosco)’, 즉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덤불’이었다. ‘소토보스코’는 이탈리아어로 ‘삼림의 아래’라는 뜻이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용어로 과일이나 꽃의 배경이 되는 어둡고 냉습한 곳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썩고 있는 나무뿌리, 이끼, 곰팡이, 도마뱀, 뱀이 우글거린다. 이탈리아 문호 단테가 빛이 존재하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어두운 숲속(selva oscura)’을 의미한다. 카라바조는 빛과 질서는 어둠과 혼돈의 자식이란 진리를 400년 전에 발견해 인류에게 선물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대 문화를 활짝 연 예언자다.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2호 (2025.01.08~2025.01.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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