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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이슈 윤석열 정부 출범

윤석열 체포 앞두고…87년 6월 항쟁의 성지 대전 중앙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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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대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전 중앙로 은행동네거리를 지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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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대전경찰서 앞 모퉁이를 돌아 중앙로에서 충남대생들과 합류하는데 이쪽 인도에 줄 서 있던 시민들이 손뼉을 쳐줬어. 건물 창문에도 흔드는 손이 보이고…놀이패 깃발 들고 걷느라 힘들었는데 불끈 힘이 솟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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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선화동 옛 충남도청 앞 중앙로 입구에서 이동준(목원대 85학번, 전국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총장)씨가 1987년 6월15일을 기억했다. 서용석(충남대 85학번, 대전시립연정국악단 사무국장)씨가 말을 받았다. “난 전날 유인물 찍느라 학교에서 밤새웠거든? 아침에 후배가 도시락을 싸다 줘 먹었는데 배탈이 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죽는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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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진 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기획위원장, 이동준 전국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총장, 허태정 전 대전시장, 서용석 대전시립연정국악단 사무국장(왼쪽부터)이 지난달 27일 대전역 광장에서 1987년 6월 항쟁 사진을 들고 윤석열 구속을 외치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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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5일을 당시 대전의 청년들은 독재투쟁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대전의 청년·시민 1만여명은 중앙로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손뼉 치며 행진했다. 대흥동성당 등에서 소규모 시위를 한 적은 적지 않았지만 충남대는 유성, 목원대·침례신학대는 당시 목동, 배재대는 도마동, 한남대·대전산업대는 오정동·삼성동, 대전대는 용운동 학교에서 각각 출발해 중앙로까지 걸어서 진출하고, 시민들까지 합류해 투쟁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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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전후 대전 중앙로 ‘손 지도’.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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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이 대전경찰서 앞을 지날 즈음 한 아주머니가 시장바구니에서 주스를 꺼내 청년들에게 주었다. 가두에서 손뼉 치던 시민들도 몽블랑제과점과 슈퍼마켓, 김밥집에서 이것, 저것 사 들고 나와 “먹고 힘내라”며 청년들에게 건넸다.



서용석 국장은 “학교 민주광장에서 5천여명이 모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의혹 진상을 밝히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자는 집회를 열었다.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는데 저지선이 뚫리기에 아무 대책도, 이유도 없이 유성 쪽으로 뛰어나갔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깬 데 이어 페퍼포그(가스 차) 두대를 불태우고 무작정 시내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훌라송을 요즘 말로 떼창하고 손뼉 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서 국장은 “대책은 무슨…계획도 없이 수천 명이 그냥 걷고 뛰며 시내로 나갔다. 다른 학교들도 중앙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나온 것”이라며 “학교부터 걷느라 발이 얼마나 아팠던지 모른다. 경찰차 불태우고 시내 도로를 다 점거하고 시위하는데 겁 안 났다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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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당시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 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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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은행동네거리에 이르자 오른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민정당사 앞에서 전두환의 호헌선언을 규탄했다. 수시로 붙잡히기 일쑤였던 길 건너 ‘은파’(은행동파출소의 줄임말) 앞에서도 분노 가득한 구호를 외쳤다. ‘은파’는 얼마 뒤 화염병에 전소해 다시 지어지는 운명을 맞았다.





평소 충남도청에서 대전역 방향으로 왼쪽 이면도로는 식당가가 즐비했고 동양백화점 네거리(동백사거리) 주변은 유명 의류·잡화 매장, 건너편은 현재 으능정이 거리로 불리는 이안경원통, 대전극장통, 유락통, 미락통이 이어졌다. 건물마다 경양식집, 커피전문점, 호프집, 당구장, 빵집, 음악감상실이 즐비해 밤늦도록 인파가 끊이지 않았던 터라 이곳에서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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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5일 중앙로에서 충남대 등 대전지역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합류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연호하며 행진하고 있다. 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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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충남대 문과대 학생회장 가드(경호)였던 허태정(충남대 85학번, 더민주전국혁신회의 상임대표) 전 대전시장은 “얼떨결에 중앙로까지 나왔는데 빵과 음료수를 던져주며 환호하는 시민들을 만났다. 민심이 전두환 정권에 등 돌렸다는 걸 직접 확인하는 순간 학생운동을 하며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내려 웃다 울다 하며 걸었다”고 했다.





당시 대학생 등 청년들의 민주화 투쟁은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와 직결된다. 전 대통령은 87년 4월13일 특별 담화를 통해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한다’고 발표했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 차기 대통령을 정할 테니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전두환의 군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무력 진압했다. 또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탄압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했다. 이에 범야권·학생운동권·종교계 등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꾸리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에 나섰다.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국본은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10일을 기해 전국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 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 국민대회 하루 전인 6월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대회 출정식에서 이한열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 이한열씨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7월5일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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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쪽에서 촬영한 1980년대 중앙로, 중앙데파트와 은행동네거리, 충남도청이 보인다. 대전시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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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충남도청 도지사실에서 바라본 중앙로의 현재 모습.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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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대전 경찰은 행사장인 대흥동 성당을 원천 봉쇄했다. 이에 시위대는 대전극장, 성심당, 중앙시장, 중앙데파트, 대전역 등에서 경찰에 쫓기면서 밤늦도록 숨바꼭질 시위를 한 뒤 괴정동 성당과 대전제일감리교회에서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충남대학교 민주화운동사’는 이날 대전에서 63명이 연행되고 23명이 다쳤다고 기록했다. 6월15일 대전 중앙로 집회는 6·10 대회의 연장 선상에 있다. 대학별로 6·10 보고대회를 열고 기말고사 거부를 결의한 뒤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6월15일 대전 중앙로 집회는 숨 고르기를 하느라 전국이 소강 국면일 때 호헌철폐 투쟁의 불씨를 키운 도화선이었다고 한다. 손규성(전 한겨레신문 기자) 씨앤씨티에너지 홍보이사는 “한국일보가 16일 1면에 대전 중앙로 1만명 집회를 보도했다. 대전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은 즉각 대구, 부산, 서울은 물론 시·군으로 들불같이 번져 26일까지 전국에서 500만명이 동참하면서 6·29 호헌철폐 선언을 끌어내는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6·15 대전 중앙로 집회를 이끈 이들은 운이 좋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대전·충남권 정예 기동대들이 6·10 대회에 대비해 서울로 차출돼 시·군 경찰관과 파출소 의경 등이 임시로 기동대를 꾸려 허술했고 △당시 충남대 외곽은 담 대신 논·밭과 붙어있어 교외 진출에 유리했으며 △학생운동권과 시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꼽았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대전역 광장이어서 대중이 흩어지지 않았던 점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도 15일부터 며칠간 계속된 중앙로 집회는 녹록지 않았다. 이동준 사무총장은 공중전화 부스 위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사과탄에 맞아 발목 등이 찢기는 상처를 입었다. 이광진(목원대 신학과 84학번) 대전경실련 기획위원장은 중앙로 변 식당으로 숨어 검거는 피했지만 “고생한다”며 손님들이 건네는 막걸리를 물리치지 못해 고초를 겪어야 했다. 허 전 시장은 경찰을 피해 달아난 곳이 운성빌딩 뒤쪽의 이른바 방석집 골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복 차림의 여성이 ‘그냥 가느냐’고 손매를 잡아끄는데 ‘다음에 꼭 들르겠다’고 말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약속은 못 지켰다”며 웃음 지었다. “이놈들아 작작 쏴라. 최루탄도 국산화했다더니 전 것보다 더 맵네.” 시민들은 최루탄이 터져 안개 낀 것처럼 앞을 가리고 숨이 턱턱 막혀도 시위대를 욕하는 대신 경찰에게 항의하며 힘을 보탰다.





한편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논의하던 전국총학생회장 연석회의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꾸리기로 결의했다. 전대협은 8월18일 충남대에 모여 출범 전야제를 열고 다음날인 19일 새벽 학생회관에서 투표를 해 이인영(고려대 총학생회장)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1기 의장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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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정 전 시장 등이 시내에서 집회하다 쫓기면 숨었던 중앙시장의 한 단골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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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진 대전경실련 기획위원장이 대전역 앞 한 상가에서 NH농협으로 바꿔 옛 은모래다방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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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진씨 등이 중앙시장 먹자골목으로 들어서더니 몇몇 가게를 가리켰다. 문이 닫힌 가게는 유리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생일집, 별난집, 서울통닭, 진로집, 청양식당, 광천식당, 희락반점, 형제집, 소나무집 등 중앙로 주변 이면도로에 있는 식당들은 청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이던 아지트였다.





1988년 11월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촉구하며 대전지검 공안검사실을 점거해 구속됐던 허 전 시장 등 8명, 다른 사건으로 수배된 사실을 모르고 이들을 면회 갔다가 붙잡힌 이광진 위원장 등이 출소해 찾은 식당도 이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전의 원도심 노포맛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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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중부경찰서 옆 골목길은 대전역 코레일 본사 건물까지 한눈에 보인다. 세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의 아지트 구실을 한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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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본사 건물이 보이는 대전역 앞 중앙시장 쪽 골목길은 50여년 보석가게·시계점·전파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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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경찰서 옆 골목길은 대전역 코레일 본사 건물까지 한눈에 보인다. 세대는 바뀌었지만, 이 길은 여전히 술 좋아하는 청춘들로 북적이는 설탕수박, 대전부르스, 나사호프, 흑태집 등 음주 역사가 켜켜이 쌓인 명소들이 있다. 이곳은 화실·음악실·서실과 한지·붓 전문점, 표구점 등이 집중된 문화예술의 거리이기도 하다. 전국이 좋아하는 성심당 본점, 떡볶이 포장마차들도 이 골목에 있고, 1980년대 잘 나가던 10~20대들이 찾던 유락백화점의 코파카바나 나이트클럽도 이 골목에 있었다.





이 길의 끝 대전역 앞 골목 초입은 대전에서 손꼽는 시계수리점 신창사가 50여년 동안 지키고 있다. 주변은 경부선이 놓이고 대전의 첫 시가지가 조성된 뒤 한 세기 동안 보석가게들이 터를 놓지 않았다. 동쪽 원동네거리 쪽 탤런트 전양자씨의 빵집 에펠제과가 있던 건물을 지나면 중앙시장 주출입구가 있다. 과일·야채·생선·건어물 등은 물론 먹자골목, 양키시장, 주단골목, 그릇가게, 상포사, 헌책방, 포목점을 휘휘 둘러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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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로 은행동 으능정리 거리.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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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의 핵심은 대전천~은행동네거리 구간 약 300m 거리다. 1974년 대전천을 복개하고 위에 지은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는 30년 동안 대전 상권의 중심이었다. 중앙데파트는 입주 상가들과 중앙관광호텔과 카사블랑카 나이트클럽, 홍명상가도 다양한 입주 상가들과 나이트클럽이 여러 개 영업했다. 특히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와 옥상의 롤러스케이트장은 안 가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간 이는 없다고 할 정도로 10~20대가 즐겨 찾는 명소였다. 두 건물은 2008년과 2009년 대전천-목척교 복원사업에 따라 철거됐다. 대전천 옆 태전마트는 하얀 토끼가 상징인 대전백화점이었다. 대전백화점은 이순자 집안 소유라고 소문나 건물 앞에서 집회가 열리는 등 횡액을 겪었다.





서용석 국장은 으능정이 거리 입구에서 신승훈씨와 김지연씨가 무명시절 노래하던 엘브즈 음악감상실 자리를 가리키고는 “80년대 시내에는 커피전문점이 지금만큼 많았다. 데이트도 했지만 격렬하게 토론하는 장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옛 충남도청 앞에서 만나 중앙로와 이면도로를 돌아보는 사이 어둠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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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준 전국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총장(왼쪽 셋째) 등이 으능정이 거리를 걸으며 1987년 6월 항쟁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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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로 목척교, 2008년과 2009년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가 각각 철거되고 대전천·목척교가 복원돼 1980년대 모습을 찾기 어렵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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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장에 이어 허 전 시장, 이 위원장, 이 사무총장이 커피집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날씨도 춥고 관절과 발바닥도 예전 같지 않은 눈치다. 중앙로 지하상가에서 촉촉한 군고구마와 걸쭉한 쌍화차를 파는 한 찻집에서 몸을 녹였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 민중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됐잖아.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여겼는데 박근혜, 윤석열이 뽑혔단 말이지…” “근원을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역사 청산을 못 한 사이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 챙긴 부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주류 기득권으로 행세했고 보수로 포장해 권력을 연장해 왔잖아.” “김대중, 노무현 1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박근혜 정권을 세운 걸 보면 반역자들이 여전히 부와 권력을 세습화해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거지. 난 그 연장선상에서 윤석열이 친위쿠데타를 도발했다고 봐.” “과거사 청산은 꼭 해야 할 숙원이지. 더 늦기 전에 처벌보다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에서라도 과거사를 정리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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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로 은행동파출소 앞에 세운 1987년 6월 항쟁 기념비.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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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진 대전경실련 기획위원장이 지난 4일 오후 대전 서구 은하수네거리에서 열린 윤석열 퇴진 집회에서 시민에게 손팻말을 나눠주고 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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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공감하며 차 한 모금하는데 아이를 앞세운 한 시민이 인사한다. “시장님 안녕하세요. 아이에게 사인 좀 해주세요.” 알아보는 시민을 만난 허 전 시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유. 제가 고맙쥬. 애 이름이 뭐여유?” 허 전 시장이 고향 충남 예산의 구수한 사투리로 반겼다.





다시 거리에 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은행동네거리 옛 대전상공회의소 앞 6월 항쟁 기념비 앞에서 윤석열 탄핵 집회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이동준 사무총장은 “우리 때는 조직 꾸리고 학습해 집회에 참석했는데 지금은 청년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스스로 나오는 게 보기 좋다. 발언 내용은 다양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꾸려고 아스팔트에 서는 마음은 같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광진 기획위원장이 말을 받았다. “세대는 다르지만 4·19혁명, 6월 항쟁, 지금 상황을 이끄는 건 청년이야. 87년에 뿌린 씨앗이 싱싱한 시민의식으로 자랐으니 이제 우리는 응원봉 든 청년들을 응원하고 동의하는 꼰대가 될 차례야.”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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