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이처럼 전쟁 책임을 강조했던 일본 언론계의 ‘거두’ 와타나베 쓰네오(渡辺恒雄) 요미우리신문그룹 본사 대표이사 겸 주필이 19일 새벽 폐렴으로 도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98세.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그룹 본사 대표이사 겸 주필이 19일 별세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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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로 불릴 만큼 오랫동안 세계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의 일인자로 군림했던 와타나베 주필은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1950년 요미우리에 입사한 이래 정치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일본 보수의 원류로 평가받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를 시작으로 일본을 움직이는 정계 거물들을 밀착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등 굵직한 외교 현안에도 직간접적으로 간여했을 정도였다. 그가 2006년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연재했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36세의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을 자민당 실세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당시 부총재)와 연결해준 장본인이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비밀 회담 내용을 가장 먼저 보도한 것도 와타나베였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아베 신조(安倍晋三),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등 역대 총리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막후에서 정계 구도를 리드하고, 때로는 ‘제언 보도’라는 형태로 자신이 직접 판을 짰다. 1994년 자위력 보유 등 사실상 ‘보통국가’를 명시한 ‘헌법 개정 시안’을 발표해 패망 이후 일본사회에서 금기시되던 개헌 논의에 불을 지핀 게 대표적이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한·일 회담 외교문서. 2005년 외교부가 공개했다. 당시 기자 와타나베는 메모 내용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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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권력 주변에 있어 악명도 높았다. 정계와 미디어계에선 그의 약칭에 빗대 ‘나베쓰네(ナベツネ)란 괴물’이란 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런 오명을 마냥 싫어하진 않은 것 같다. 한때 ‘리더로 삼고 싶지 않은 인물’ 4위에 오른 걸 두고, 그는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면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없을 것”(아비루 루이 산케이신문 논설위원)이라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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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반대하던 공산주의자
젊은 시절 그의 사상은 딴판이었다. 그는 도쿄대 철학과 재학 시절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에서 “천황제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으로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러나 안에서 본 공산당의 실체는 달랐다.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는 등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군을 닮은 교조적 태도에 회의감을 느끼고 전향했다고 한다. “정치기자로서 자민당 내의 치열한 권력 투쟁과 파벌 싸움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시선”(문예춘추)도 이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일본의 과거사에 엄격했던 것도 같은 배경에서였다. 19살에 징집돼 일개 병으로 느꼈던 군국주의의 실상을 “젊은 세대에 전하겠다”는 사명감이 컸다.
지난 8월 15일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일본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 집단참배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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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처럼 지낸 JP의 충고도 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해 다룬 요미우리 사설(2001년 3월 2일자)을 보고 화가 난 JP(당시 자민련 명예총재)는 와타나베를 찾아가 전쟁 경험을 한 세대로서 책임 의식을 강조했다.(중앙일보 연재,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이후 요미우리는 와타나베 주도로 2005년 1년간 과거사를 반성하는 내용의 ‘검증 전쟁 책임’을 연재했다. 이뿐만 아니다. 와타나베는 2020년부터 이듬해까지 방영된 NHK 다큐멘터리(총 3편)를 통해 ‘전쟁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로서 사명감을 강조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
와타나베는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침략한 가해국과 침략당한 피해국의 정치적 상징”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권력자의 공식 참배를 전면 반대했다. 실제로 야스쿠니를 참배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 대해 “역사도 철학도 없으며, 공부도 하지 않는 교양 없는 인물”(뉴욕타임스 인터뷰)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주일대사는 19일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 보수의 진짜 리더였다”며 “생전에 그를 만났을 때,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우익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도 “일본사회가 전후 세대로 교체되면서 ‘역사수정주의’가 주류가 됐는데, ‘균형수’ 역할을 해주던 와타나베 주필과 같은 분들이 사라지니 우리로선 참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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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부 위업 달성…종이신문에 애착
와타나베는 경영자로서도 탁월했다. 그가 중견기자로 활약하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요미우리는 아사히신문에 이어 만년 2위지였다. 그러다가 77년 아사히를 추월, 79년엔 ‘세계 1위’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91년 사장에 오른 와타나베는 전국 판매망을 늘리며 기세를 더 올렸다. 그 결과 94년 ‘마의 1000만부’를 돌파했고, 2001년 1월엔 전무후무한 기록(1031만부)을 찍었다.
최근 요미우리의 발행 부수가 618만부(지난해 하반기 평균)까지 급전직하한 상황에서도 그의 종이신문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올해 창간 150주년을 맞아 발표한 ‘주필 메시지’에선 “디지털 사회에서도 정치·경제·국제·사회 등 각 방면의 뉴스를 종합적·체계적으로 알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매체로서 신문의 가치는 해를 거듭할수록 재평가되고 있다”며 “기자들의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질 높은 정보를 전국 판매점망 등을 통해 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 27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이날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 당시 후보가 이겼다는 내용의 요미우리신문 호외를 나눠주고 있다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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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명문 야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구단주로도 활약했다. 요미우리와 그룹 자회사인 니혼TV 등 거대 미디어를 배경으로 일본 최대 프로스포츠인 야구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타고난 ‘일 중독자’였다. 요미우리의 19일자 부고 기사에 따르면 와타나베는 지난달 말까지도 정기적으로 임원회의와 사론(社論)회의에 참석해 경영과 논조의 방향을 지휘했다. 또 별세 며칠 전까지 사설 원고를 검토하는 등 ‘종신 주필’로서의 직무를 계속했다고 한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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