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모아나 2’ 스틸컷. 배급사 제공 |
“지금까진 역사를 배우기만 했어요. 이제 당신 덕분에 역사를 사는 거죠!”
청년 모니가 모아나에게 하는 말이다. 그들은 악의 신 날로와 맞서는 중이다. 날로는 바다의 사람들을 연결해주던 섬 모투페투에 저주를 걸어 바다의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운명을 건 결전을 앞두고 모아나와 선원들은 두 주먹을 단단히 쥔다. 모투페투를 해방할 수만 있다면, 바다의 사람들을 다시 연결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모아나 2’에서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다.
모니는 반신반인 마우이의 팬으로, 마우이의 팬픽을 그리는 게 유일한 낙인 오타쿠다. 마우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모아나의 선원이 되기를 자처했지만, 건장한 신체와 달리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이야기 속에 사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험이 계속되면서 그는 변해간다. 그리고 역사를 그리는 것을 멈추고 역사를 살기로 선택한다.
그렇다면 그의 팬픽은 한낱 몽상에 불과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상상은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염원의 발로이기도 했거니와, 그의 상상력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아이디어’, ‘우리들의 용기’가 되었다. 또 다른 선원인 로토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니의 팬픽이 그려진 천을 이용해 위기를 벗어날 새로운 돛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마음이 불의에 맞서는 순간, 그러니까 새로운 정치적 시공간을 열어내는 열정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것은 언어를 초월하는 명랑한 힘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일이 2024년 12월 광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2016년 박근혜 탄핵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화여자대학교 시위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새로운 민중가요가 되었다. 그리고 12·3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이후 열린 광장에서는 수많은 응원봉이 케이(K)팝과 함께 눈부시게 빛나는 중이다. 우리는 정치 팬덤이 훼손한 정치에 케이팝 팬덤이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물론 어떤 팬덤은 역사를 망치고 어떤 팬덤은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은 틀렸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건 오로지 이 순간에 어떤 판단을 했는가, 그리하여 어떤 시민이기를 선택했는가에 달렸다. 광장에 선 청년들이 응원봉을 흔든다고 팬덤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케이팝 팬덤은 꽤 오랜 시간 민주주의의 감각을 익혀왔다. 윤리적이지 않은 작품을 거부하고 “우리 오빠”의 성폭력과 범죄행위에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해온 팬덤, 착취적인 케이팝 산업 구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아티스트의 생일에 필요한 곳에 쌀을 기부하는 팬덤. 그러므로 팬심과 시민의식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들은 이미 그들의 역사를 새로이 써왔다.
애니메이션 ‘모아나 2’ 스틸컷. 배급사 제공 |
시절 탓에 무슨 영화를 본들 지금의 정치적 격동에 접속해서 작품을 받아들이게 된다. 2012년 대선 때도 그랬다. 이미 ‘질서 있는 퇴진’, 즉 탄핵으로 권좌에서 내려온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그날 밤, 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극장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레미제라블’을 봤다. “민중의 소리가 들리는가?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 다시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민중의 음악이! 내일이 오면 시작될 새로운 삶이 이곳에!” 그 유명한 ‘민중의 노래’를 들으며 끝까지 버텨서 독재자의 딸이 역사의 무게를 배우는 날을 꼭 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날을 보았다.
사실 ‘모아나 2’는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으로 끌어오지 않아도,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폴리네시아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모아나’ 시리즈는 대륙을 발판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주의자들을 상징하는 사악한 힘 날로에 맞서 싸우는 해양부족의 결기를 보여주고, 대륙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바다의 관점을 배우도록 이끈다.
폴리네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식민화는 우리가 익히 아는 지도 위에서 이미 확인된다. 제국의 탐험가들이 태평양을 ‘발견’했다고 떠들면서 함부로 갖다 붙인 이름들을 살펴보자. 마셜제도, 샌드위치섬, 뉴칼레도니아, 뉴아일랜드, 캐롤라인제도, 베링해 등. 태평양 섬들에 대한 지도 제작은 북반구 유럽인들의 악취 나는 나르시시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가 지나갔으니 내 이름을 붙인다”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선주민들이 사용하던 고유한 이름은 사라져버렸다. 미국령의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여겨지는 하와이 왕국이 어떤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아나’ 시리즈는 이런 식으로 대상화된 태평양을 폴리네시아 선주민의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하려 한다. 덕분에 ‘모아나’는 폴리네시아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모아나’ 시리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특히 신성한 존재인 마우이를 ‘근육질의 나르시시스트’로 만든 것에 대해 폴리네시아 문화에 대한 폄하이자 지나치게 납작한 정형화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당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를 망각한 북반구인들에게는 꽤 쓸 만한 교훈을 남기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는 때로 너무 무지해서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고, 최근의 디즈니는 딱 그만큼의 교육에 특화되어 있다.
대륙의 논리에서 벗어나 바다와 섬의 마음을 배우는 것. 북반구 중심의 대중서사 안에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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