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윤석열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특수부대가 한국 국회의사당 유리를 깨고 들어가는 장면을 본 미국인들은 기시감이 들 것이다. 2021년 ‘1·6 의사당 난동’ 때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의사당 창문을 깬 장면과 겹쳐서다. 사태를 희화화하자면 윤석열 대통령의 행동은 트럼프에 대한 오마주(예술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작품 표현을 모방하는 것)라고 할 수 있겠다. 트럼프는 민간인들을 사주했지만 윤 대통령은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는 더 강렬한 표현을 보여줬다.
이번 사태를 트럼프와 연결 지어 보는 것은 여기서 그칠 게 아니다. 트럼프의 재등장과 맞물리는 지점들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내란을 감행한 시점, 이후의 ‘관리’ 방안과 관련해 분명히 미국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원래 한국 지도자들은 미국 눈치를 보지만 쿠데타 세력은 더 눈치를 봤다. 미국은 박정희, 전두환과 초기에는 거리를 두는 척하다가 충성을 확인하고는 백악관으로 불러 ‘기름 부음’을 해줬다.
그런데 왜 윤 대통령은 자나 깨나 민주주의를 말하는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일 때 일을 벌였을까?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이 “심각한 오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강경한 발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의 부정적 반응은 능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 쪽에 비공개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더 험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으로서는 바이든이 ‘민주주의의 민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들어갔을 때 일을 감행하는 게 낫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는 각국 독재자들의 무소불위 권력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여왔다. 트럼프의 비서실장을 지낸 존 켈리는 그가 독일 장군들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부러워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미국 상황을 중심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내의 정치·사회적 압박 증가로 기회의 문이 닫히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끝나가니까 다음달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사후 재가를 받으면 된다고 판단했음 직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극을 저지른 전두환은 이듬해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 방미해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런 맥락과 관련해 트럼프의 침묵도 눈에 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사건에 대해 소셜미디어로 한마디 할 법하지만 여태 입을 다물고 있다. 내란이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만을 추구하는 그는 패자에 대해 얘기하기가 싫을 것이다. 자기 방식을 흉내 내다 실패한 사람에게 조소를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성공했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국 대선 직후 대통령실이 매달린 조기 회동이 성사됐다면 윤 대통령은 트럼프를 사전에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윤 대통령이 계속 자리를 지키면 트럼프는 어떻게 나올까? 바이든 행정부는 윤 대통령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은 트럼프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이 어렵다. 그는 상대의 약점을 기회로 삼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한국은 속히 당당한 정부를 세워 트럼프라는 파고에 맞서야 한다. 그렇잖아도 시급한 문제이지만 트럼프까지 고려하면 낭비할 시간이 더 없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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