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6일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서 시가행진하고 있다. 대열 맨 앞 흰색 상의를 입은 사람이 경창수씨다. 본인 제공 |
지난 3일 김용만씨(60)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계엄’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본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고 식은땀이 옷을 적셨다. 눈을 감아도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씨는 1980년 5월18일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광주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쓰러졌고 군홧발에 짓밟혀 기절했다. 쓰러진 그를 누군가가 골목으로 옮겨줘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5·18 당시 전남도청을 지켰던 시민 소년병 경창수씨(63)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엄군이 던진 폭탄 파편이 박혀 있는 양손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광주 YWCA 건물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다 체포된 소년병 출신 이덕준씨(61)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뜬 눈으로 계엄의 밤을 새웠다.
이들은 2024년 12월 국회의사당과 1980년 5월의 전남도청이 포개져 보인다고 했다. 국회에 난입한 무장 공수부대는 44년 전 마주친 계엄군을 떠오르게 했다. 이씨는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파노라마처럼 돌아갔다”고 말했다. “계엄군이 국회의사당 유리창을 깼을 때 숨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아주 오래전 체포되면서 개머리판에 얼굴이 찍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죠.”
김씨는 “누군가에게 계엄은 영화 속의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것”이라며 “철모를 쓰고 군장을 멘 계엄군이 진압봉을 들고 달려와 사람들을 두들겨 패다가, 내 눈앞에 진압봉 몽둥이를 들이밀었을 때 공포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980년 5월 시민들이 뒤로 손이 묶인 채 계엄군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행렬 뒤에서 세 번째 살구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이덕준씨이다. 본인 제공 |
44년 전 광주의 계엄은 이들의 인생을 바꿔놨다. 경씨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소년 ‘동호’였다. 경씨는 도청에 줄지어 누워있는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족에게 인도하는 시신관리반이었다. 그는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워 도청에 남으려 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도청에 쳐들어오자 누군가 “너는 어리니 역사의 증언을 꼭 하라”며 경씨가 입었던 군복을 갈아입혀 도청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경씨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하게 됐다.
김씨는 1981년 고등학생 단체의 5·18 항거운동을 기획하다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돼 고문을 당했다. 이씨도‘김효순·심미선양 사건’ ‘박근혜 국정농단’ 등 광화문에 촛불이 등장할 때마다 광장으로 달려갔다. 이씨는 “시민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면 5·18 때 생각이 나서 매번 광장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계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씨는 “피 흘려서 민주주의를 지켰으니 계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당했나”라며 “계엄부터 탄핵안 투표 불성립까지 분노와 경악과 한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전두환 등 독재자들을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번 사태에서도 탄핵은 물론이고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해야 한다”라고 했다.
시민들이 지난 9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집회는 주말인 지난 7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투표 불성립 이후 평일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창길 기자 |
세 사람은 모두 지난 7일 국회 앞 촛불 집회에 갔다. 도로를 메운 시민들은 이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 이씨는 “여의도역에서 국회까지 끝도 없이 들어오는 시민들을 보며 고무됐다”며 “특히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면서 눈물이 나면서도 너무 좋았다. 촛불을 든 친구들이 5·18 시민이 아닐까”라고 했다.
경씨는 “그동안 집회와 시위에 많이 나가봤지만 이렇게 젊은 사람들, 여성들이 많은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응원봉으로 멋진 시위를 하고, 어찌 민주주의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냐고 외치는 청년들을 보니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윤 대통령 탄핵이 될 것 같나’라는 질문에 경씨는 “과거가 그랬듯, 결국 국민이 결정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답했다.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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