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칼럼니스트 |
과연 그럴까? 코미디가 힘 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옳다. 마치 궁정의 어릿광대처럼 말이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 앞에서 흔히 대통령이나 고위 정치인, 대부호와 유명 인사를 떠올린다. 미국의 오리지널 SNL의 모습도 그런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불러내 난처한 농담을 던지며 건강보험 문제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준다거나, 일론 머스크에게 학창 시절 왕따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것 등등.
SNL 코리아 역시 ‘맑눈광이 간다’, ‘심여야식당’, ‘위켄드 업데이트’ 등에서 정치와 사회 이슈를 꾸준히 다뤄왔다. 용산과 국회, 의료계 논란, 국정감사 촌극 등 코미디라는 장치 속 여러 주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며 비판적 시각을 제시해 오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SNL은 억울하다. ‘높으신 분’들에 대한 풍자라면 미국 못지않게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문제시되었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풍경에 대한 스케치도 정치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일부 MZ 세대의 허세를 꼬집은 후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을 풍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SNL이라는 ‘광대’가 ‘왕’의 심기를 종종 거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은 유권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치인 따위가 아니다. 나의 불편함이 곧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스스로가 권력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대중, 그들이 바로 21세기의 왕이다.
모든 정치적 올바름이 ‘대중독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왜 올바른지, 어떻게 스스로를 더 올바르게 교정해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플 따름이다.
이건 정답이 없는 문제다. 중요한 건 SNL을 비롯한 코미디언들이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개그 각’이 보이면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든다. 선을 넘나들기 때문에 우리는 선에 대해 인식하고, 논의하고, 때로는 그것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옮길 수도 있다. 어릿광대를 괘씸하고 무엄하게 여기지만 말고, 웃어넘기며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말이다.
노정태 칼럼니스트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