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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씨네멘터리] 두 번 볼 수 없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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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21《마리우폴에서의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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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쓸 영화라면 보통 두 번 정도는 본다. 어떤 영화는 ―여건이 허락하면― 특정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이 잘 안 나더라도 그냥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두 번 볼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요즘 영화나 드라마가 잔인한 장면이 좀 많은가? 극사실적인 전쟁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다음 주에 개봉하는 《글래디에터2》도 잔인한 폭력씬 때문에 1편과 달리 '청불' 등급을 받았다. 그런 영화들에 어느 정도 길들여진 나지만, 직접적인 살육 장면도 없는 이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가 더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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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이 아니라― 내가 순전히 좋아서 두 번 이상 본 영화 목록 중에는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라는 SF 블록버스터도 들어있다. 영화 속에서 지구를 파멸시킬 괴행성을 막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원소가 결합해야 하는데, 물·불·흙·바람의 네 가지 원소 외에도 ‘사랑’이라는 제5원소가 필요하다.

이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제5원소인 외계인 ‘릴루’로 분(扮)한 밀라 요보비치가 지구의 역사를 마치 A.I.처럼 영상으로 딥러닝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그녀는 “생명을 구한들 무슨 소용이죠? 어차피 다시 파괴할텐데”라고 말한다. 지구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밀라 요보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모델이자 배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그녀는 “고향이 파괴되고, 가족들은 난민이 되고, 그들의 삶이 불탄 파편 속에 놓이는 걸 보면서 가슴이 찢어졌다”고 말했다. 마치 릴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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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우크라이나 태생이다. 올해 수상자인 한강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으로 업적을 인정받았듯이, 스베틀라나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는 기념비같은 작품”을 써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그녀는 한강처럼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저널리스트로서 그는 이른바 ‘목소리 소설’이라는 스타일을 개척했다. 전쟁과 재난을 체험한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논픽션 문학을 써나간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수많은 러시아 여성들의 증언을 채록한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세상(전쟁)의 뭔가를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려 시도할 때 이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이야기하려 하고, 다른 이들은 이해하려 하지만, 모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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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 전쟁 발발 초기, 러시아의 침공으로 포위된 우크라이나 도시 마리우폴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을 보면서 이 책이 떠올랐다.

“이야기하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모두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 영상 매체가 힘을 발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전쟁과 미디어의 역사에서 로버트 카파같은 사진가로 상징되는 ‘비텍스트 기록 매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진도 여전하지만, 요즘은 영상이 더 큰 파급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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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남은 AP 취재진, 《마리우폴에서의 20일》 / 스튜디오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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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ssociated Press)가 해냈다. 개전 초, 러시아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서방 언론이 다 떠난 마리오폴에 유일하게 목숨 걸고 잔류한 AP통신의 기자들은 민간인 피해자들의 입을 대신한다. 러시아의 공습으로 심정지 상태에서 실려온 아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의료진은 이를 촬영하던 AP의 기자들에게 외친다.

“이 망할 놈들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찍으세요. 푸틴 XX한테 이 아이의 눈을 보여주세요. 여기 울고 있는 의사들도 놓치지 말고요. 그 망할 놈한테 똑똑히 보여주세요.”

올해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의 감독은 영화인이 아니다. 감독도 아니고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인터넷과 전화가 끊겨 고립된 도시에서 그가 위성 전화로 겨우 겨우 전송한 조각 조각난 민간인 피해 영상은 유수의 방송 미디어를 타고 세계 각지에 전파된다.

축구를 하다가 폭격을 당해 다리가 날아가버린 소년… 영안실이 부족해 다용도실에 보관된 시신들… 골반뼈가 부스러진 채 들것에 실려 이동하는 임신부… 전기·수도·난방 없이 운영되는 와중에 폭격마저 맞는 병원…마을 공터에 길게 참호처럼 판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한데 묻히는 시신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을 글로 자세히 묘사하는 건 부질없어 보인다. 아니, 그렇게 할수록 전쟁은 더 클리셰화하는 것만 같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대로 전쟁 대신 칼럼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劇化)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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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폭격을 받는 아파트 / 스튜디오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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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전쟁. 일상은 일상.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일상과 전쟁의 구별이 없어서 더 공포스럽다.

폭격으로 부서진 집을 보며 오열하는 한 여인을 찍는 기자는 '계속 촬영해야 할지, 멈추고 달래야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취재진은 전장(戰場)의 거리에서 기레기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의료진에게 “지금 기분이 어때요?”, “지금 느끼고 있는 걸 말해주세요”라고 묻는다. 직업 정신이다. 그러나, 잔인한 질문이다. 그래도, 전쟁보다 잔인하지는 않다.

기자들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고통을 기록해야만 한다. 이들이 전송하는 영상에는 “편집자 주의사항 ‘잔인한 장면 주의’”라는 메모가 붙어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지켜보기 고통스러울 광경이죠. 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워야만 합니다.” (It's painful to watch. But it must be painful to watch.)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스베틀라나와 인터뷰한 2차 대전 참전 용사, 시베리아 출신의 여성 고사포 지휘관,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는 스베틀라나에게 말했다.

헤어지기 전에 피로그(러시아식 파이)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쥐어준다. “이건 시베리아 피로그야. 특별하지. 이 피로그는 돈 주고도 못 사…..” 그리고 주소와 전화 번호가 적힌 긴 명단도 건넨다.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 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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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 의해 전쟁이 생중계되다시피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전쟁이 무감(無感)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매일 뉴스 화면에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지구 전쟁은 더 이상 특별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 않다.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에 있는, 세계 유일의 휴전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조차 그렇다. 호전성을 기르거나 전쟁 준비를 하자는 게 아니다.

이 영화를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땅에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전쟁의 비극성에 지금보다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영화 속의 전쟁’이 아니라 ‘일상의 전쟁’이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 생생히 기록돼있다.

“거리에서 실려온 시체들. 내 뇌는 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겠지만 카메라는 이 모든 걸 기억하게 할 거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中 기자의 내레이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문학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영상 저널리즘이 해낸다고 앞서 말하긴 했지만, 영상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문학이 해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내 기록물들 중에서 단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출판 검열 당국에서 삭제당한 에피소드를 적어놓은 수첩이었다… (중략)...

출판 검열당국이 삭제한 내용에서


우리 부대에 여자는 나 밖에 없었어…..다 남자 병사들이었지. 평소엔 바지를 입었는데, 그날따라 여름 원피스를 입은 거야. 그런데 하필 갑자기 그게 터졌지 뭐야…..생리가…..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예정일보다 이른 때였어. 너무 불안하고 또 너무 속을 끓여서 그랬던 거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세상에, 얼마나 창피하던지! 정말 말도 못하게 수치스러웠지! 우리는 잠자리도 여의치 않아서 닥치는대로 아무데서나 잠을 잤어. 덤불 아래서도 자고, 도랑 속에서도 자고,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도 자고. 숲속은 우리들이 자기엔 잠자리가 늘 부족했지. 우리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행군했어… (중략)...
그러다가 포로로 잡혔어. 포로로 붙잡히기 바로 전날 나는 두 다리가 모두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던지 온몸이 내 피로 흥건하게 젖었어…..무슨 힘으로 밤에 숲까지 기어갔는지 몰라…..우연히 나를 발견한 빨치산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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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논설위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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