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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이슈 일본 신임 총리 기시다 후미오

"북일 연락사무소 만들겠다"는 일본 총리,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전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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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재단 (staff@peacefoundation.or.kr)]
이시바 내각 탄생의 배경

지난 9월 27일 일본에서 자민당 총재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민당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로 알려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가 당선되었고, 10월 1일 열린 임시 국회에서 그가 수상으로 지명되었다. 그에 따라 새로운 자민당 집행부가 꾸려졌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내각 출범 직후 이시바 수상은 바이든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앨버니지 호주 수상 등과 전화회담을 실시했고, G7 전화회담에도 참석했다. 10월 4일에는 국회에서 '소신표명연설'을 실시했다. 이로써 이시바 내각의 초기 방향 설정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아베 정치로부터의 조심스러운 방향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민당 총재선거를 앞두고, 20%대 지지율에도 재선을 노리며 출마 의지를 내비치던 기시다 수상이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했다. 기시다를 얼굴로 내세워 다음 총선을 치른다면 자민당이 정권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당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한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는 '파벌 정치, 원로 정치, 돈 정치'라는 자민당 정치의 세 가지 폐습과 얼마나 결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통일교와의 유착, 불법정치자금 문제 등은 이 폐습이 묵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기시다는 스스로 자신의 파벌을 해체하는 것으로 불법정치자금 사건의 진원지인 아베파의 해체를 이끌어 냈으나, 문제 당사자들에 대한 문책 수준은 국민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주요 파벌이 해체되고 원로들의 구심력이 낮아진 결과, 파벌 내에서 후보자를 정리하던 방식이 무너졌다. 그 결과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에는 이례적으로 9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그중에서도 선거전 초반을 주도했던 것은 43세의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였다. 젊은 자민당으로의 변화를 호소하면서 관심을 모았으나 거듭되는 정책 토론에서 한계를 보였다.

국민적인 인기를 배경으로 이시바가 무난히 선출될 것으로 보였으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의 막판 기세가 무서웠다. 그러나 다카이치가 아베 노선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한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일본 국민은 파벌, 원로, 돈으로 얼룩진 아베 정치에 혐오감을 보이고 있었다.

유사 정권교체로서 이시바 내각 탄생

정권교체의 위기 앞에서 자민당은 파벌 정치에 거리를 두고, 아베 비판의 선봉에 서 있던 이시바를 총재로 선출했다. 자민당 안에서 대안 세력을 끌어내어 권력을 안겨주는 유사 정권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포괄정당인 자민당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국민적 인기에도 파벌 정치에 적극 끼어들지 못해 손해를 보고 있던 이시바에게, 자민당의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시바의 당선으로 2012년 이후 지속된 아베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시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원인은 아베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아베의 강력한 리더십을 배경으로 탄생한 기시다 내각은 역설적으로 아베 정치의 극복을 숙제로 안고 있었다. 기시다 내각 출범을 전후해서 일본 국민은 아베 내각 시기 추진되었던 미·일동맹 강화와 아베노믹스의 성과보다도 그 한계에 민감해져 있었다.

이를 보완 수정하기 위해 기시다가 내놓은 정책이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와 '새로운 자본주의'였다. 아베의 국가주의 노선과 달리 자민당의 본래 주류였던 자유주의 노선의 적자로서, 중국에 대한 관여 정책과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 하는 경제를 기대하게 하는 구호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추진했던 것은 아베가 남긴 숙제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2022년 12월,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와 방위비 대폭 증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보관련 3개문서(국가안보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를 채택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책들 사이에 혼선이 빚어졌고,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용이 따라가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아베 저격 사건이 일어나 자민당 유력 정치인들의 통일교 커넥션이 불거져 있던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법정치자금 문제가 잇달았다.

두 사건은 모두 아베파 정치인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베 정치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이에 대한 미진한 대응을 보며, 일본 국민은 기시다 내각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자민당이 생존을 걸고 선택한 것이 이시바였다.

이시바를 선택한 자민당이 해야 할 일은 아베 정치와의 결별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시바의 당내 리더십 확보가 1차적 관건이다. 비주류로 일관하며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이 이번에 이시바가 총재로 선출될 수 있었던 최대 강점이라면, 이는 앞으로 그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다만 아베 사망과 파벌 해체로 아베파는 구심력을 잃고 동요하고 있다. 유일하게 파벌을 유지하던 아소(麻生)파는 총재선거에서 이시바의 대항마였던 다카이치를 지지했다. 이시바는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 당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자민당 집행부나 내각 구성에서 아베파 배제가 눈에 띄었다. 당분간 이시바에게 당내 입지를 굳힐 기회가 주어졌다.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만년 소수파의 설움을 안고 살았던 이시바와 그의 내각은 장수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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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일본 의회에서 '소신표명연설'을 하고 있는 이시바 시게루 신임 일본 총리. ⓒUPI=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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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내각의 등장과 한·일 관계

그런 이시바의 등장이 한·일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여러 분석과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가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독도문제와 안보구상 등에서는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서 낙관하긴 어렵다.

과거사 인식에서도 배상 책임과 관련해서는 이시바의 인식이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과거사 관련해서 아베나 기시다 보다는 적극적인 발언이 나올 수 있다 해도, 법적 배상과 관련한 실질적인 진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에 더해 그의 안보구상은 한국의 대일외교에 새로운 과제를 안겨줄 수 있다. 그는 일본의 무장력이 '외국에서는 군대, 국내에서는 자위대'인 상황을 깨고 싶어 한다. 즉 헌법 제9조에 손을 대서, 자위대를 명실상부한 군대로 명문화하는 것을 지론으로 삼아 왔고, 이를 '정론'이라 불러 왔다.

이는 헌법을 그대로 두고, 실질적으로는 중무장의 길을 걷고 있는 상황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즉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무장력에 대한 문민통제의 필요성이다. 그 최고의 형태는 헌법에 의한 통제다. 이시바의 개헌론은 아베의 국가주의적 개헌론과 달리 입헌주의적이다.

이른바 리버럴 개헌론에 가까운 그의 입장은 아베보다 덜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그의 내각 하에서 개헌 가능성은 더 높다. 그의 지론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미·일동맹에 대한 그의 지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미·일동맹이 비대칭적인 것이라며 이를 대등한 것으로 바꾸어 갈 것을 주장한다. 위의 헌법 개정 주장도 이를 위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안보에 기여하는 것과 대등한 입장에서 일본이 미국의 안보에 기여할 수 있으려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미국이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당장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 다른 지론이던 '아시아판 나토(NATO)'도 아직은 서랍 속의 구상이다. 중국을 명시적으로 적대시하는 집단방위구상이라면 중국이 반발할 것이며, 중국을 포괄하는 포용적 집단안보구상이라면 미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시바 내각의 외교 안보는 당분간 아베 이후 정착된 노선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 다만 11월 미국 대선 결과 트럼프 행정부가 탄생한다면, 기존의 한·미·일 안보협력 긴밀화 움직임은 복잡한 전개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이시바의 북·일 관계 인식

이시바 내각의 외교에서 가장 주목할 분야는 북·일 관계다. 이시바는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에 도전장을 내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일 상호 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다는 지론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는 대북정책에서 아베 노선으로부터의 수정을 의미한다.

아베는 대북외교에서 세 가지 원칙에 강하게 집착하면서 압박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납치일본인 문제가 일본 외교의 최중요 과제라는 것, 납치일본인 문제 해결 없이 북·일 국교정상화는 없다는 것, 납치일본인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공인 납치일본인의 전원 생환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납치일본인의 생존을 전제로 이들을 구출하는 것이 해결이라는 아베와 달리 이시바는 그들이 생존해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조사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양에는 일본 측 연락사무소를, 도쿄에는 북한 측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는 것인데, 이는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극우파 반북론자들이 이러한 접근을 북한에 굴복하는 것이라 비난하며 이시바에 대한 비난 캠페인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지론을 공약으로 채택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시바 내각과 대북 적극론자들

이시바를 지지하는 의원 그룹, 이시바가 조직한 자민당 집행부, 그리고 내각 구성을 보면 이시바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들 면면에서 초당파 북·일국교정상화추진의원연맹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연맹 회장인 에토 세이시로(衛藤征士郎), 간사장 대리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沢勝栄) 등이 이시바의 선거대책본부에 힘을 보탰으며, 방위상에 임명된 나카타니 겐(中谷元)과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된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도 연맹 회원이다.

총재선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이와야 다케시(岩屋毅)는 또 다른 초당파 의원연맹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연구회'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이시바시 단잔은 대일본주의에 반대했던 '소일본주의자'로서 전전에는 식민지 포기를 주장했으며, 전후에는 자주외교를 주장하며 아시아 이웃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정치인이다. 이와야는 외상으로 임명되어 이시바 외교의 진두지휘를 맡았다.

이처럼 자민당 간사장, 외상, 방위상 등 주요 포스트에 이시바의 대북 외교 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지난 10월 4일의 국회 '소신표명연설'에서는 "북·일평양선언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납치피해자들의 귀국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통한의 극치"라며, "북·일평양선언의 원점에 되돌아가서" 납치일본인 문제 해결과 기타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천명했다.

북·일평양선언을 두 차례나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는 데서, 그가 현실적인 해법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도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북·일 관계가 움직일 때, 우리 정부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면밀한 계산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시바 내각 탄생은 일본 국내적으로는 아베 정치를 종식시키고, 국제적으로는 신냉전을 회피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 정부에게는 이시바 내각 탄생을 남북한 대결구도 완화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과 일본이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를 환영하고 적극 협조하는 한편, 새로운 전략적 구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평화재단 (staff@peacefoundati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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