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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으로 양복점 사업 망한 전직 군인, 대통령이 되다 [대통령의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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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편집자주] 대통령의 '전직'은 중요합니다. 그들의 정치 성향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후보를 소개할 때 그들의 전직을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검사' 해리스와 '범죄자' 트럼프라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공화당은 트럼프를 '성공한 사업가'로, 해리스를 '존재감 없는 부통령'으로 그립니다. 두 후보의 전직은 미국의 미래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요. 대통령의 전직이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앞선 미국 대통령들의 삶을 통해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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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사진=미 백악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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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즐긴다고 모두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지도자는 독서를 즐긴다."

(Not all readers are leaders, but all leaders are readers)

독서에 관한 유명한 명언을 남긴 미국 33대 대통령(1945년 4월~1953년 1월) 해리 트루먼(1884년 출생)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안경을 쓰게 된 이유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어 했지만 시력이 나빠 입학을 거절당할 정도였다. 육군 사관학교 입학이 좌절된 뒤 트루먼은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철도 회사 시간 기록원, 신문사 배달원, 은행 점원 등을 거쳤고 농부로서 가족 농장 일을 돕기도 했다.

군인이 되겠다는 트루먼의 의지는 여전했다. 그는 1905년 미주리주 방위군에 자원입대해 6년 동안 근무했다. 이어 1917년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포병 장교로 재입대했다. 원래 시력이 나빠 입영이 불가능했으나 시력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포병 연대를 지휘했는데 그가 지휘하는 부대에서는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훗날 트루먼은 1차 세계대전 참전이 자신의 리더십을 발견하는 특별한 경험이 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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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재임 시절 신었던 신발들 /사진=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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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광을 망치지 않으면서 발을 밟는 것도 요령이다."

(Tact is the ability to step on a man's toes without messing up the shine on his shoes)

트루먼은 신발에 관한 명언을 남길 정도로 신발 애호가였다. 그가 재임 시절 신었던 신발 96켤레는 지금도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돼있다. 그의 패션 감각은 양복점 운영 경험에서 비롯됐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대위로 전역한 트루먼은 친구인 에디 제이컵슨과 함께 고향 캔자스시티에서 '트루먼 앤 제이컵슨'이라는 양복점을 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이 많으니 양복도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양복점은 한동안 괜찮은 수익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1922년 대공황이 불어 닥치자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이때 경험은 트루먼에게 소규모 자영업자의 어려움과 경제 불안정성, 경제적 책임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심어줬다.

사업 실패로 파산한 트루먼은 캔자스시티 법률학교에 입학하며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1922년 민주당에 가입한 그는 당의 도움으로 잭슨 카운티 법원 행정 담당 판사로 선출됐다. 1924년 재임용에 탈락해 자동차 판매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2년 뒤 재선출됐다. 1927년에는 수석판사(행정관)에 선임돼 1934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34년 미주리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은 194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연방 상원의 '전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트루먼은 위원회 의장으로서 군납비리를 광범위하게 조사해 당시 물가 기준 약 150억달러의 국고를 보존했다.

이때의 성과는 당시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루스벨트가 4선 러닝메이트로 트루먼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1944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트루먼은 1945년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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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49년 1월20일 취임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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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트루먼이 대통령 재임 시절 책상에 명패로 새긴 문구다. 2022년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한 문구이기도 하다.

트루먼의 명언대로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은 무거운 책임의 연속이었다. 취임 직후 독일이 항복하며 전쟁은 끝나는 듯했으나 연합군에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이 남아있었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고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됐다. 이후 소련이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위협하는 등 세계질서를 어지럽히자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이 자유주의를 지키고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국제 사회가 냉전 체제로 돌입하는 계기가 됐다.

트루먼은 전쟁 후 미국 사회 재건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자영업자, 행정 공무원으로서 경험을 살려 실용적이고 현실적으로 경제 문제를 다뤘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그가 1948년 재선 당시 내세운 '페어딜 정책'은 이러한 성향을 잘 드러낸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계승한 '페어딜 정책'은 모든 집단과 개인이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미의 사회복지정책이다. 사회보장, 노동권 확립, 시민권 확대 등을 표방했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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