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선언 6주년 기념사서 주장 파문
“통일 결정 미래 세대 맡기고 평화 추구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삭제·개정해야”
국가보안법 폐지·통일부 정리도 제시
문재인 “통일담론 전면 재검토 필요”
전문가들 “정부공식통일방안에 몰이해
북핵 해법 등 구체 계획 없이 문제 접근
김정은의 반통일 2국가론과 유사” 비판
당내서도 “현실론·체념론 뒤섞여” 지적
2018년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임 전 실장은 이날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 참석, 기조연설에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며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했다.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관계는 있을 수 없다. 평화적인 두 국가, 민족적인 두 국가여야 한다”며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2018년 4월 27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위원장이 경기도 파주 판문점 내에 남북의 화합을 상징하는 소나무를 심은 뒤 양측 수행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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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전 실장은 특히 “비현실적인 통일 논의는 이제 그만 접어두자. 더 이상 당위와 관성으로 통일을 이야기하지 말자”며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만을 헌법에 남기고 모든 법과 제도, 정책에서 통일을 들어내자”고 했다. 그러면서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지우든지 개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거론하며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국제사회에서 각각 독립국가로 주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영토 조항은 그 자체로 모순일뿐더러 북한과 관련해 각종 법률 해석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한 국가연합론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접어두자고 제안하면서 “남북 모두에게 거부감이 높은 통일을 유보함으로 평화에 대한 합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날 행사에 참석해 임 전 실장과 비슷한 취지의 언급을 했다. 문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나선 데 따라 기존 평화담론과 통일담론도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게 됐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인데 현 정부는 그럴 의지도, 역량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2국가론은 지난해 12월 김 위원장이 먼저 공식화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제8기 9차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밝혔다.
임 전 실장의 이날 연설은 ‘통일에 대한 결정은 미래세대에 맡기고 지금은 통일을 지우고 평화만 추구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헌법 영토 조항 삭제 또는 수정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 등을 제시했다. 기존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실상은 다를 게 없는데, 통일과 특수관계론을 폐기하고 영토 조항을 삭제하자는 파격 조치를 곁들였다. 전문가 사이에선 “통일방안에 대한 몰이해”라는 지적이 나왔다. 기존 통일방안 역시 남북 교류·협력→남북 연합→남북의 미래세대가 통일을 결정, 점진적이고 질서 있는 통일, 평화적 통일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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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위배 논란과 국민적 거부감도 예상된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했다.
국민, 주권, 영토는 국가의 3요소다. 이번 영토 조항 삭제 제안은 반헌법, 반국가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또 북한이 다음 달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에 영토 조항을 새로 추가하겠다고 공개한 상황에서 우리 영토 조항을 흔드는 행위가 돼 수용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평화통일을 최우선 정부 과제로 앞세웠던 정부 인사임에도 이제 와서 “통일이 무조건 좋다는 보장도 없다”, “더 이상 당위와 관성으로 통일을 이야기하지 말자” 등의 언급도 “자기 부정”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또 중국 영토인 동북3성을 거론하며 “두 개의 국가 상태를 유지하며 남북이 협력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경제 지평을 한반도 전체와 동북3성까지 확장하는 동북아 단일경제권, 동북아 일일 생활권을 우리의 새로운 목표로 삼는다면 충분히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고 한 대목도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임 전 실장의 주장은 굳이 이름을 붙이면 감상적 통일 포기론 같다”며 “통일을 버리고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으로 나간다고 할 때 북한이 화해협력으로 안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국제적 불법행위인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통일안보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또 “평화통일론을 통해 흡수통일론에 대한 대안적 담론을 만들어 나가야 할 시점에, 통일은 빼고 평화만 하자는 것은 오히려 영구분단론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전직 통일부 장관은 “평화적 2국가론은 지극히 단견”이라며 “영구분단으로 가자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평화가 만들어질 수도 없기에 허구적”이라고 했다. 그는 “평화와 통일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잘못된 정치적 프레임을 만들고, 젊은 세대를 핑계로 현실을 추수,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두 개의 정부라는 실체성을 인정하면서도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의 과도적인 특수한 관계라는 규정을 두 개의 축으로 균형을 잡아왔던 건데, 하나의 기둥을 뽑아버리는 격”이라며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 교차하는 한반도 외교지형에서 우리 민족이 가졌던 배타적 권리와 발언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지난 대선을 전후해 국내법적으로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통일은 폐기하자는 2국가론이 확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문재인정부 청와대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중진 의원은 “소모적 논란이 부상하는 것을 막고자 발언을 삼갔지만, 이런 경향이 확산하는 데 대한 강력한 우려와 문제의식도 상당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당 핵심관계자는 “현실론과 체념론이 뒤섞인, 처음 듣는 통일론”이라며 깎아내렸다.
김예진·김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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