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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성 영화감독 ㄱ씨는 영화 촬영 뒤풀이 자리에서 20대 여성 연출부원 ㄴ씨에게 일을 소개해주겠다며 연락처를 받았다.
그뒤 ㄱ씨는 ㄴ씨에게 영화 시사회 티켓을 주겠다고 연락하며 여러 차례 사적인 만남을 요구했다. 자정을 전후해 전화를 걸기도 했다. 정작 그가 소개한 일자리는 없었다.
50대 남성 작가 ㄷ씨는 오티티(OTT) 드라마 제작을 위해 30대 여성 보조작가 ㄹ씨와 정기적으로 회의를 했다. ㄷ씨는 회의 중 “내 친구는 돈을 많이 벌어 20대 여성과 사귄다. 내가 아파트를 얻어주면 너도 나와 사귈 거냐”, “나와 친해지면 일하기 쉬울 거다. 더 큰 작품 하고 싶지 않냐”는 발언을 일삼았다.
ㄹ씨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ㄷ씨는 “나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로 신고하는 거 아니지?”라며 분위기를 살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영화계 성폭력 예방교육에서 활용할 예시를 발굴하기 위해 지난해 영화제작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뒤 정리한 사례다.
2016년 시작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부터 2018년 미투까지, 영화계에도 반성폭력 운동이 크게 일었지만 위계를 악용한 성폭력은 여전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해 12월12일부터 지난 1월5일까지 영화계 종사자 812명을 대상으로 한 ‘2023년 한국영화산업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에선 ‘최근 2년 동안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답변이 51.5%로 절반이 넘었다.
강력한 위계와 인맥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영화계의 특성이 성폭력을 온존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화 제작 종사자들은 대부분 프로젝트별로 모이는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계약한다. 경력을 쌓으려면 업계 내 평판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심재명 든든 센터장은 “피해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위계관계에 따른 성폭력”이라며 “영화업계의 특성상 피해자들은 경력 단절을 가장 두려워 한다. 업계에서 ‘문제를 삼는 사람’ ’위험 요소가 있는 사람’이란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피해자가 발화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짚었다.
조혜영 영화평론가도 “‘알음알음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평판이나 소문에 의해 다음 행보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업계 특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시간이 돈’인 현장에선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분위기도 존재한다.
연출 쪽 종사자 ㅁ씨는 “현장에서 성적 불쾌감을 느낄 만한 성희롱을 들은 적 있지만, 촬영 중 문제를 크게 키울 수 없어 참고 넘어갔다”고 밝혔다. 여성 영화감독 ㅂ씨는 “대부분의 현장은 돈과 시간에 쪼들린다”며 ”감독 등 책임자가 성희롱·성폭력 문제나 예방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심 센터장은 “2021년부터 영화 제작 전 성폭력 예방교육이 의무화됐지만, 여전히 형식적으로 교육하거나 생략하는 곳들도 있다”며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예방 교육의 확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짚었다.
ㅂ감독도 “결국 책임자가 의지를 가져야 하는 문제”라며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피해를 말할 수 있는 현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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