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다양한 시간의 층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김중업, 1957년 유유산업 공장건물 설계
안양시 ‘金과 건축’ 테마 공공예술 기획
박물관 조성 중 문헌 속 ‘안양사’ 터 발견
계획 수정해 사찰 유구 드러내고 보존
시민들 사랑 받는 휴식처로 매력 발산
1100여년 전 안양사의 흔적과 70년 전 산업 유산이 공존하는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은 다양한 시간의 지층이 퇴적된 장소다. 그래서 상상의 힘으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는 타임 슬립을 즐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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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APAP가 개최됐던 2007년 안양시는 안양예술공원(옛 안양유원지) 초입에 있는 유유산업 공장 부지를 매입해 ‘김중업박물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안양예술공원의 성격을 강화하는 목적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건축가 중 한 명인 ‘김중업(1922~1988)’과 ‘건축’이라는 콘텐츠를 APAP로 끌어들인다는 취지도 있었다.
사실 김중업과 안양시 간의 관계는 거의 없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근대건축의 세계적인 대가 르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근무한 기간과 강제 추방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흐릿한 연결고리를 찾자면 김중업이 23세 때 근무했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안양에 있었다.
2009년 안양시는 박물관 조성을 위한 ‘안양복합문화관 리모델링 현상설계’를 개최했다. 설계 지침 중 유유산업 공장 건물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덧댄 일부만 철거하고 대부분을 재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설계자로 선정된 JU건축사사무소(박제유 대표소장)는 당시 남아 있던 19개의 건물 중 김중업이 설계한 건축물을 포함해 13동을 기념관, 전시공간, 작가 레지던스, 커뮤니티 센터, 공연장, 체험장, 스튜디오 등으로 활용하는 안을 제안했다. 설계자가 제시한 개념은 흔적, 경계, 맥락으로 풀어낸 ‘시간의 풍경(time-SPACE)’이었다.
김중업박물관 조성 사업은 유유산업 부지에서 안양사(安養寺)의 유구가 발견되면서 반전을 맞게 된다. 그 전까지 안양사는 문헌상으로만 전해져 왔다. 전설에 따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남쪽을 정벌하러 갔다가 삼성산을 지날 때 산꼭대기에 오색구름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이를 본 능정 스님이 왕건에게 절을 짓고 안양사라 칭하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고 제안해 창건됐다. 불교에서 ‘안양’은 아미타불이 사는 ‘극락’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양시 입장에서 안양사는 도시의 근간이라 할 만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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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산업 부지에 유적이 있을 거란 짐작은 그전부터 했었다. 1957년 유유산업이 포도밭이었던 땅에 공장을 조성할 때 ‘중초사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공장 입구 옆에 세워 두었다. 중초사(中初寺)는 안양사보다 73년 앞선 827년에 경주 황룡사의 항창화상이 10여명의 법사와 함께 건립한 사찰이다. 더불어 인근에는 1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수동 마애종’도 있다.
일단 안양시는 공사를 중단하고 네 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여덟 개 시설의 터가 발견됐는데 그중 안양박물관과 특별전시관 사이에 강당지, 승방지, 동회랑지가 남북 14m, 동서 41.4m 규모로 나왔다. 문제는 강당지의 위치와 규모로 봤을 때 안양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금당(金堂)이 유유산업연구소(현 김중업건축박물관) 자리에 있을 거라 추정됐다. 발굴을 위해서는 연구소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안양시의 고민은 깊어졌다. 오래된 기준으로 보면 1000년이 넘은 안양사 금당은 근대 산업시설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설계자가 김중업이 아니었다면 깊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금당의 유구를 발굴하기 위해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을 허무는 순간 안양시가 APAP에 끌어들이고자 했던 ‘김중업’과 ‘건축’이라는 콘텐츠를 포기해야만 했다.
선택의 결과는 ‘양자택일’이 아닌 ‘일거양득’이었다. 애초 보존하기로 했던 13개 건물 중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과 굴뚝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은 철거한 뒤 그 자리에만 안양사의 유구를 드러내는 방안을 택했다. 2014년 개관 시 김중업관, 문화누리관, 어울마당, 안양사지관은 현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교육관, 특별전시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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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넘는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김중업은 1956년 3월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 유유산업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그래서 이 건물들은 명보극장(1956), 서강대학교 본관(1958)과 함께 그의 초기작으로 분류된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남쪽 입면에 돌출된 ‘F’자 형태의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건물을 지지하는 5개 구조체의 일부인데, 이 구조체로 인해 내부에는 내력벽이 필요 없게 되고 건물의 입면도 하중을 받지 않게 됐다. 2층 복도 벽 상부의 리드미컬한 창틀과 유리로 처리된 외벽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출입구가 있는 동쪽 입면은 유리, 벽돌, 시멘트와 같은 다양한 재료로 분할돼 있다. 그리고 입구 상부의 캐노피(canopy)를 받치고 있는 유려한 ‘Y’자 형태의 기둥이 김중업 특유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김중업건축박물관 동쪽에는 생산동으로 썼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안양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몇 차례 증축됐는데 그 흔적을 건물 북쪽에 남아 있는 기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양박물관 서쪽 입면 양쪽 모서리에는 조각가 박종배가 만든 모자상과 파이어니어상이 놓여 있다. 모자상은 소중한 인간 생명의 가치를, 파이오니아상은 기업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담고 있다고 한다. 김중업은 이 조각상이 놓일 수 있도록 건물 모서리를 ‘ㄱ’자 형태로 접었다.
현재 김중업건축박물관 주변에는 1100년이 넘은 안양사의 유구와 70년 전 유유산업의 공장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도시의 근간이 되는 신화이지만 쉽게 체감하기 힘든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들이 추억할 수 있는 과거이지만 문화재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지닌 이곳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안양박물관 꼭대기다. 이곳에서 안양사의 흔적을 내려다보면 고려시대 승려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양박물관 쪽으로 시선을 조금 돌리면 바쁘게 일하는 유유산업 근로자들의 모습이 포개진다. 시간의 다이얼을 조금 정확히 맞추고 김중업건축박물관을 바라보면 30대 중반 의욕 넘치는 건축가 김중업의 모습도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내 주변에 지금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햇볕을 쬐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장소의 진정한 가치는 지금과 다른 시대의 산업 유산에서 1000년 전 흔적과 지금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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