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출신으로 프랑스 대사를 지낸 그는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다. 일본 내에서도 권위 있는 문화유산 전문가로,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는 목소리를 낸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일본 도쿄의 한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그는 사도광산 추천 배경을 설명하며 “조선인 분들에게 피해를 줬던 것에 대해 일본이 정직하게 전시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사도광산에 대해 보류(Refer) 판단을 내리며 “전체 역사를 설명하라”고 한 유네스코자문기구(ICOMOS·이코모스)의 권고를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유네스코는 21일부터 이달 말까지 인도에서 세계유산위원회를 열고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마쓰우라 고이치로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지난 16일 일본 도쿄에서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전체 역사를 담은 정보센터를 세워야 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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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조선인 징용 정보도 남아있어”
그는 “(사도광산에서)혹독한 환경에서 일본에서 징용공이라는 형태로, (조선인을) 의무적으로 일하도록 했으며 피해도 발생했다”며 “게다가 이런 데이터(정보)가 거기에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도광산이 (등재 신청 기간이)에도시대에 한정해 있지만 제2차대전 당시를 확실히 포함해 정보 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면서 기간을 금광 채굴이 활발했던 17세기 에도(江戶)시대(1603~1868년)로만 한정해 논란이 일었다.
마쓰우라 전 사무총장은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함도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이와 관련, 일본 정부는 지난 2015년 군함도(하시마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군함도에 전체 역사를 밝히는 시설물을 건립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2020년 도쿄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세웠다. 또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은 거의 밝히지 않고, 조선인에 대한 임금체불이나 차별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유네스코도 이례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시정을 권고했다.
그는 “유네스코에서도 비판받은 것은 인적 증언을 중심으로 (전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객관적인 증거를 토대로 하기보다는 일부의 기억에 의존했다가 문제가 됐다는 취지다.
사도광산에서 과거 수작업으로 금 채굴이 이뤄지던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은 모습.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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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엔 역사 반영돼”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까지 세계유산 등재가 한·일 양국의 외교전으로 비화한 데 대해 그는 “세계유산에는 역사가 반영돼 있어 각국 정치문제가 관여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어느 시점에서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세계유산 문제가)해결되지 않는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꺼내든 건 북한의 첫 세계유산인 고구려 고분군 등재 시도 때 이야기였다. 2003년 북한이 고구려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북한과 우호 관계였던 중국이 반대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듬해 중국이 북한의 고구려고분군이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된다면서 지린성(吉林省) 일대 고구려고분군을 중심으로 등재하려 했다”며 “당시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물밑에서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관계가 좋았던 북한과 중국조차도 역사 문제에선 반대로 갈렸다”며 결국 2004년 각기 유산으로 등재되도록 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실제 당시 북한은 평양의 동명왕릉 주변의 고구려 고분 등을, 중국은 환런지역 등의 고구려 유적 등을 등재신청해 각기 등재에 성공했다.
그는 “국보는 국가의 보물, 세계유산은 세계 전체, 인류 전체의 보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면서 “한·일 미래 세대가 상대의 역사관을 서로 이해하며 그 위에서 서로 손잡고 나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오부치'의 50년 친구, 마쓰우라는 누구
마쓰우라 고이치로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첫 아시아 출신 첫 유네스코 사무총장으로 10년 간 일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1937년생인 그는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던 아버지가 중국 근무를 하면서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잠시 다녔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뒤 배편으로 귀국했다. 부친이 사준 링컨 전기 등을 읽으며 자랐고, 중학교 시절엔 수영에 빠져 병이 얻을 정도로 몰입하기도 했다. 도쿄도립 히비야고를 졸업하고 도쿄대 법대에 입학, 재학 중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1959년 외무성에 들어가 미국과 홍콩, 아프리카 관련 업무를 맡은 뒤 1994년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됐다.
" 50년 내 친구 오부치 " 프랑스 대사였던 그를 유네스코 총장이 되도록 물밑 지원을 한 건 가쿠슈인(学習院)중학교 동창인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1937~2000)였다. 그는 일본에서 유네스코 위원회가 열리자 의장국 자격으로 회의 의장에 마쓰우라를 지명하기도 했다. 마쓰우라가 당선된 뒤 2000년 초 일본서 열린 축하 모임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4월 1일 모임을 마지막으로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마쓰우라는 “내가 부담을 준 건 아니었는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마쓰우라 고이치로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지난 16일 일본 도쿄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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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의 방북, 그리고 김대중 " 그는 사무총장 재임 중 이뤄진 두 차례의 방북에 애정을 드러냈다. 첫 방북은 2000년 8월이었다. 당시 북한의 2인자인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만나는 등 큰 환대를 받았다.
마쓰우라는 “당시 북한은 나보다 두 달 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이 묵었던 호텔 방을 내줬는데, 일정 중 김 대통령이 갔다는 우동집도 갔다”고 설명했다. “방북 직후 한국을 찾아 김 대통령을 만나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기뻐하더라”고 떠올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북한의 고구려고분 등재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고구려고분은 한반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세계유산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말하자 김 대통령이 유네스코를 통한 대북 지원에 나서줬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북은 2008년 9월 이뤄졌다. 2004년 고구려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였다. 북한은 이 때 백두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했다. 그는 “백두산은 김일성(항일무력투쟁 유적지 선전) 등 정치적으로 관련된 부분 때문에 무리라고 판단했고, 개성이 유망하다고 조언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무산됐다. 개성역사지구가 2013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 그는 세 번째 초청을 받았지만, 방북하지 않았다.
" 춤 노래 뛰어났던 리설주 "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아내인 이설주와의 일화도 소개했다. 2002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문화와 비폭력을 위한 국제 10년’ 2회 행사가 후쿠오카에서 열렸는데, 북한을 포함한 5개국 어린이들이 참여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김일성제2중학교 학생 19명 등의 방문을 허락했다.
이설주(당시 13세)도 이 때 일본에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마쓰우라는“그 소녀는 매우 재주가 있어서 노래와 춤도 잘 하고, 북도 잘 쳤다”며 “나중에 그 소녀가 김 위원장의 부인이 돼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마쓰우라는 2009년 유네스코 총장 임기를 마친 뒤 일본으로 돌아와 ‘내일의 교토문화유산 플랫폼’ 회장 등을 맡아 지금도 문화유산과 관련된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가고 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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