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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423: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감히 꿔보지도 못했던 꿈이다.
오늘 함께 읽는 책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에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었다는 걸 미처 인식은 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하나 풀었습니다.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들은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손이 닿는 낮은 자리에 수평으로 버튼이 배열돼 있습니다. 이제 모두 그런 패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실은 여전히 버튼이라고는 모두 수직 패널로만 달려 있는 엘리베이터들이 더 많죠.) 작은 듯 큰 그 변화가 적어도 지하철 엘리베이터에는 표준으로 자리잡기까지, 그 견고한 듯 당연했던 ‘기존의 표준’에 균열을 냈던 첫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다가 불현듯 그를 만났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30여 년 전 내놨던 제안과 그것을 받아들인 한 학교(그리고 그 학교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한 입법이)가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의 구조까지 바꾼 그 ‘첫번째들’이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꿈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꿈은 심연을 직시하고 무無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꿈꾸는 것은 무한한 우주를 짓는 일이다. 슈록 선생님,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희한한 뇌로 삶과 죽음에 대해 열심히 알아내고 있었던 여섯 살의 나 앨리스야, 너에게도 고맙구나.
오늘 함께 읽고 싶은 책은 1974년 생 호랑이띠, 호랑이 같은 여자, 중국계 미국인 앨리스 웡의 에세이집이자 각종 인터뷰 모음집인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입니다. 앨리스 웡은 오바마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국가장애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한 장애 인권 활동가입니다. 그는 선천성 근위축증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근육이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힘이 빠지는 병입니다. 근위축증을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쉽게 생각하는 동작들, 이를테면 ‘아빠다리’를 하고 앉는 자세 같은 것도 근육의 힘이 따라와 주지 않아 만들어 내기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몸의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호흡하는 근육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신생아 앨리스 웡은 목근육이 머리를 지탱하지 못해서 기는 단계를 건너 뛰고 바로 걷는 단계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7살 무렵에는 그 걷기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의료진은 그녀가 18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부모에게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74년생 호랑이띠 앨리스 웡은 이제 50세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일들을 해내고, 생각해 내고, 꿈꿔왔습니다.
에릭: 미국장애인법이 어떻게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보면 흥미로워요. 접근성 제공이 의무 사항이 됐기 때문에 관련 담당자들, 그러니까 주차, 교통, 시설 설계, 건축, 디자인 등의 담당자가 모두 모인 대규모 위원회가 학교에 꾸려졌어요. 큰 모임이 꾸려졌고, 어떤 것들은 즉각 우선순위에 올랐지요. 하지만 예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몇 년 뒤 앨리스가 와서 엘리베이터 버튼이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휠체어 사용자는 높은 층 버튼을 누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어요.앨리스: 고층 건물은 층수가 많으니까 버튼이 수직으로 몇 줄에 걸쳐 있잖아요. 그런데 (앉은 상태로는) 다 닿지가 않거든요. 우리가 시설관리부였던가 건축부였던가의 어느 분과 만나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나요. 제가 수평으로 된 패널을 하나 더 추가하면 어떻겠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 분이 "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방문객, 환자, 직원, 학생 모두가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에 수평 패널이 다 생겼죠. 볼 때마다 미소 짓게 돼요. 저의 개인적인 필요에서 시작됐지만 이 간단한 조정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으니까요.
앨리스 웡의 어린 시절에는 미국의 장애인권 관련 제도나 인식도 지금 같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청소년기를 지나던 1990년에 미국의 장애인 인권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모범이 된 ‘미국장애인법’이 만들어집니다. 미국장애인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이나 고용 영역에서 장애인에게 ‘합리적 편의 제공’을 하지 않는 것을 차별로 간주하고, 이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비장애인만을 상정한 시설들을 가진 학교라면, 장애인인 앨리스가 “이대로는 내가 이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시정을 요구했을 때 단 한 명의 학생의 요구라고 해도 그가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 시설들을 뜯어고치는 걸 당연한 의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앨리스 웡의 강력한 요구나 앨리스 웡의 요구로 엘리베이터에 수평 패널을 도입한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선의’만으로 수평 패널이 가능했던 게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결국, 핵심은 ‘시스템’입니다. 다만, 더 많은 앨리스 웡들과 더 많은 USCF들이 존재할수록 그 같은 ‘시스템’이 더 빠르고 단단하게 자리잡게 되는 사회가 되는 것도 분명하겠죠.
사실 처음 엘리베이터라는 물건이 만들어질 때부터 당연한 듯 붙이기 시작한 수직 패널은 상당히 좁은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키가 일정 이상 큰 성인 이상에게만 맞춰져 있을 뿐, 장애인들도, 아이들도 배제합니다. 앨리스는 USCF에 수평 패널을 제안함으로써 그 학교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혔습니다. 본인 뿐 아니라 (그때로부터 30년 후 우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평을 넓혀준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만들어나가는 시각에 좀더 많은 사람들을 당연하게 포함시킬수록, 우리 모두의 세상이 더욱 넓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택과목으로 드라마 Ⅰ을 들었다. 이듬해에 드라마 Ⅱ를 들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으로 드라마 Ⅰ을 통과해야 했다. 나는 B를 받았고, 당연히 드라마 Ⅱ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활지도 선생님(일종의 담임 교사)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다소 당황스러워하시면서 드라마 선생님에게 가서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수업을 맡으신 튜더 선생님에게 갔는데, 튜더 선생님은 내가 드라마 Ⅱ를 들을 수 없다고 하셨다. 드라마 Ⅱ에는 신체 활동이 필요한 수행 과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체 활동은 판토마임이었고, 학생들은 신체의 움직임과 동작으로 이야기를 상세히 표현해야 했다. 나는 장애를 가진 상태로 판토마임을 하면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가령,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을 표현하는 판토마임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선생님은 충분히 신체적이지 않아서 안 된다고 하셨다. 합리적 편의 제공이라는 개념은 튜더 선생님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생활지도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항변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모욕적이었다. 이것은 순전한 차별이었다. 튜더 선생님은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는데, 선생님은 내게서 단지 신체의 기능적인 제약만을 보셨다. 미몽이 와장창 깨졌고 선생님의 대응에 너무나 실망했다. 교육자는 학생을 독려하고 학생의 권익을 옹호하는 존재일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고등학교 때 경험한 노골적인 차별 사례들 중 하나다. 이 차별의 즉각적인 결과 중 하나는 같이 수업을 들었던 드라마 덕후 친구들과 함께 진급하지 못해 사회적 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드라마 동아리 활동은 계속했지만 수업을 듣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나는 내가 더 세게 싸우지 않은 것이, 학교 당국에 문제제기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이 의미심장한 경험을 하고 나서, 다시는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하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에 신기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왕성하게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해온 활동가로서 앨리스 웡 자신이 얼마나 공격적이며, 타협하지 않고, 온갖 층위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활발하게 해 왔는지에 대해 당당하게 되짚어 보는 이야기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자신의 표현마따나 “’극도로 화가 난’ 에서 ‘화는 덜 났지만 여전히 가만 있지는 않는 장애 여성’”으로서의 ‘위세’를 단 한 순간도 내려놓는 지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장애인 운동가로서의 성과 또는 좌절을 이야기할 때나, 부모님과 중국식 납작 만두를 빚던 그리운 추억을 이야기할 때나,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앨리스의 삶’ 이야기로 술술 읽힙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이고요. ‘여기까지는 활동, 선언이고, 저기서부터 할머니 이야기’ 이런 식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 그렇게 읽히지도 않습니다. 그리운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나, 사회복지를 줄여나가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때나, 모두 오십 평생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살아온 호감가는 여자 앨리스 웡의 이야기입니다. 쿨하고 신랄한 ‘겉바속촉’ 언니(누나) 한 명 더 알아두고 싶은 분이라면, 그야말로 이 주말에 집어드셔야 할 책입니다.
여섯 살 앨리스: 누구세요?
마흔 여덟 살 앨리스: 나는 너야.여섯 살: 음, 나이가 너무 많은데요? 너무 많아요.
마흔여덟 살: 나도 알아. 이상하지?
혹시 [북적북적]을 들으신 후 서점에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으시더라도, 이 책의 표지를 한 번 찾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앨리스 웡은 이제 거의 늘 호흡기를 달고 생활합니다. 이 책의 리뷰를 쓴 분 중 하나인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는 “코끼리처럼 긴 코를 가진 앨리스 웡의 모습은 꼭 나를 닮아 있다. 나 역시 밤마다 코끼리가 되어 인공호흡기의 기계음을 들으며 잠든다”고 쓰고 있습니다.
코끼리의 긴 코 같다. 저는 코끼리를 참 좋아합니다. 코끼리의 그 긴 코와 지혜롭고 어딘가 기민한 눈빛,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뭔가 정확한 움직임들에서 우러나는 신비한 느낌이 아마 인도 문화권 같은 데서 코끼리를 숭배하거나 신성시하게 만들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저 인상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표지 사진에 거의 늘 달고 있다는 호흡기를 그대로 부착한 채로 눈웃음을 슬쩍 짓고 있는 프로필 사진을 올린 저자 엘리스 웡은 뭐랄까, 조금도 약해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에 자기 중심이 있는 맑고 온화한 얼굴의 여성으로 보일 뿐입니다. “’극도로 화가 난’ 에서 ‘화는 덜 났지만 여전히 가만 있지는 않는 장애 여성’”이 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맑은 얼굴의 중년 여성이 되기까지,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삶을 꿋꿋이 견지해 온 게 오히려 이 맑은 얼굴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맑은 얼굴에 앨리스 웡만큼 기여한 것이 또 있다면, (모든 사람이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사회는 아니었더라도) 그 분노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그녀의 사회일 것입니다. 앨리스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여러가지로 멋진 영향을 끼쳐올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속한 사회에 다른 멋진 사람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미국이니까’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냥 바로 여기, 지금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나라의 많은 장애인 활동가 분들이나 멋진 사람들도 그야말로 한참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굳이 미국 이야기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 안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섯 살: 나는 언제 죽어요?
마흔여덟 살: 아이고, 또 묻네. 아까 말했잖아, 나도 모른다고. 하지만 모르는 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니야.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든 모든 것을 다 알거나 다 통제할 수는 없어.
여섯 살: 오렌지 줄리우스와 핫도그를 여전히 먹을 수 있어요? 엄마와 아빠가 라파예트 스퀘어몰에 갈 때면 늘 사주시는데요. 나는 짭짤하고 단 게 좋아요.
마흔여덟 살: 아직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흔여섯살의 앨리스: 저기요, 거기 누구 있어요?
마흔여덟 살: 후아아아? 저 사람 우리야? 우리가 아주 멋있게 보이는구나!
여섯 살: 혹시 마녀신가요?
곧 출간될 [호랑이의 해: 모피가 난다](빈티지북스, 2070)에서 계속됩니다.
저는 이 책에서 W.카마우 벨이라는 흑인 코미디언의 팟캐스트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한 앨리스 웡의 인터뷰록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스 입장에서 카마우 벨이 하는 이야기 중에는 조금씩 핀트가 맞지 않는 점들이 나타납니다. 그때마다 엘리스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맞지 않는 점들을 고쳐줍니다. 카마우 벨은 그때마다 미묘하게 민망해 하기도 하지만, 그 점을 또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내 입장에서 모르는 게 있을 때, 모르는 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돼 가는 걸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런 자세로 서로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민망해질까봐,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질 때마다 귀닫고 눈닫지 않고, 이렇게 서로 일깨우고 일깨워지면서 함께 가는 것이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앨리스 웡은 이 책의 한 단락을 할애해서 스타벅스의 종이빨대를 성토하기도 합니다. 종이빨대만 쓰겠다는 스타벅스의 결정은 ‘엘리베이터의 수직패널로의 역행’ 같은 것이더라고요. 스타벅스가 환경을 생각한다는 대의로 성급하게 종이빨대 도입을 결정하기 전에, 장애인 이용자들을 포함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일부) 환경주의자들 목소리는 담고, 다른 여러 목소리를 담지 않았던 그 의사결정에 이미 ‘편협’이 먼저 깃들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직접 펴들어 보신다면, 카마우 벨의 ‘민망 포인트’나 스타벅스 종이빨대 반대론에 대한 궁금증을 직접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뜨겁고 습한 이 여름, 호감형의 호랑이 띠, 앨리스 웡과 함께 해주세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월의봄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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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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