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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에 수어 연기, 조명·음향 조정까지…‘접근성 공연’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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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에 수어 연기, 조명·음향 조정까지…‘접근성 공연’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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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연극 ‘로드 킬 인 더 씨어터’에서 무대 뒤에 해설 자막이 나오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2021년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연극 ‘로드 킬 인 더 씨어터’에서 무대 뒤에 해설 자막이 나오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 강렬한 비트의 사운드 ♪ [랩핑] 침대에 머리카락 몇 올이 떨어져 있고 바닥에 죽은 벌레가 있어도…’



비트가 흘러나오고 배우가 랩을 시작하자 무대 위 검은 화면에 흰 자막이 띄워졌다. 비둘기 역을 맡은 배우들이 ‘미안하다’는 대사를 할 땐 ‘(비둘기 1) 미안해 / (비둘기 3) 미안해 / (비둘기 2) 미안해’로 서로 다른 음성을 구분한 세세한 자막이 붙었다.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연극 ‘로드 킬 인 더 씨어터’에선 ‘모든 회차’에 한글 자막, 음성 해설, 수어 통역이 이뤄졌다. 국립극단이 1년여 준비 끝에 지난 2021년 처음 내놓은 ‘접근성 공연’이다.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주로 불렸던 관람 약자를 대상으로 한 공연 기획이 최근 ‘접근성 공연’이라는 이름과 함께 저변을 확대해 가고 있다. 대개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 편의 등에 초점을 맞췄던 데서 나아가, 접근성 공연은 장애인·노인·어린이 등 다양한 관람 약자가 공연을 접할 때 마주하는 장벽을 발견하고 개선한 공연들이다.



국립극단은 코로나19가 유행하던 2020년 대면공연 대신 ‘온라인 극장’을 열며 공연 영상에 해설자막을 붙이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접근성 공연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김정연 국립극단 공연기획팀 프로듀서는 “처음엔 접근성 공연이 무엇인지 공부부터 해야 했다. 해외 사례, 작은 극단에서 시도했던 사례 등을 전부 찾아보고 장애 당사자 등으로 구성된 모니터링단의 피드백을 받으며 기획을 고민했다”고 했다.



지난 5월6일 막을 내린 국립극단의 연극 ‘스카팽’은 수어통역사(오른쪽)가 무대 위에 올라 배우와 함께 연기했다. 국립극단 제공

지난 5월6일 막을 내린 국립극단의 연극 ‘스카팽’은 수어통역사(오른쪽)가 무대 위에 올라 배우와 함께 연기했다. 국립극단 제공


접근성 공연은 누구나 공연을 편히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 채워진다. 가령 지난 5월6일 막을 내린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은 발달장애인·어린이 등 감각 자극에 민감한 이들을 위해 조명과 음향의 세기를 낮췄고 공연 중간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수어통역사들은 무대 밑이나 가장자리가 아닌, 무대 위에 올라 배우와 함께 수어로 연기했다. ‘그림자 수어 통역’이다. 연극배우이자 스카팽 공연에서 그림자 수어 통역을 맡은 권재은 수어통역사는 “배우로서 연기하는 순간도 사랑하지만, 캐릭터와 대사를 분석해 수어로 구현하는 순간도 사랑해 수어통역사 자격을 취득한 이후 공연 통역을 자주 한다”며 “‘스카팽’의 경우 통역사가 배우와 함께 반응하기도 하고, 배우가 수어를 사용하기도 해서 연극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으로 통역의 디테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비장애인 관객들의 반응도 좋다. 그동안 국립극장, 국립정동극장 등에서 꾸준히 접근성 공연을 관람했다는 대학생 오지혜(22)씨는 “자막해설과 음성해설은 비장애인에게도 공연의 이해를 높이기에 좋은 장치다. 많은 장면과 대사들이 오가는 공연에서 놓치는 게 많은데, 공연이 주는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오씨는 “접근성 공연에 관심이 많은 관객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공연을 바라는 게 아니다. 2021년 국립정동극장은 청각장애인이 주인공인 극을 올리면서도 자막을 싣지 않다가 이후 자막 해설 공연을 꾸준히 진행하더니, 올해엔 첫 기획 공연을 접근성 공연으로 올렸다. 이런 변화가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김정연 공연기획팀 프로듀서와 김나래 공연기획팀 하우스매니저가 점자가 새겨진 연극 ‘스카팽’의 소책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고나린 기자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김정연 공연기획팀 프로듀서와 김나래 공연기획팀 하우스매니저가 점자가 새겨진 연극 ‘스카팽’의 소책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고나린 기자


물론 여전히 문화예술 공연을 즐기는 관람 약자의 수는 적다. 서울문화재단의 ‘2023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조사’를 보면 1년간 비장애인은 문화예술 공연을 4.6회 관람했지만, 장애인은 1.3회에 그쳤다. 국립극단을 찾는 장애인 관객도 아직 전체 관객의 1%에 못 미친다.



하지만 접근성 공연을 만드는 이들은 “관람 약자가 단 1명도 오지 않더라도, 접근성 공연은 당연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립극단에서 ‘접근성 매니저’ 역할을 하는 김나래 하우스매니저는 “접근성 공연은 지하철 임신부석과 같다. 임신부가 타지 않더라도 그 자리를 비워놔야 언제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모두를 위한 공연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며 “관람 약자의 경우 공연을 보러 가기까지 마음먹는 과정이 다른 관객보다 쉽지 않다고 들었다. 우리가 꾸준히 그 자리에 있어야 관객들이 언제든 찾으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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