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각) 폐막한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아노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미국 숀 베이커 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칸/신화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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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노동자들과 친구가 되면서 그 세계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성노동자를 다룬) 내 모든 작품들의 유일한 의도는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매매를 생계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2011년 ‘트리 오브 라이프’ 의 테렌스 멜릭 이후 13년 만에 미국 감독으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숀 베이커(53)는 주요 연출작에서 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왔다. 뉴욕대 영화 연출 전공 이후 독립 영화계로 뛰어든 그가 처음으로 주목받은 인디스피릿어워드 수상작 ‘스타렛’(2012)에서 우연히 괴팍한 할머니와 우정을 나누는 젊은 포르노 배우, 2015년 선댄스영화제 최고 화제작 ‘탠저린’에서 바람난 애인의 여자를 이판사판 응징하려는 트랜스젠더, 한국에서 7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 노숙자를 면하기 위해 몸을 팔지만 철없는 엄마, 2021년 칸 경쟁부문 진출작 ‘레드 로켓’에서 빈털터리로 전처 집에 빌붙어 살면서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전직 포르노 배우, 그리고 러시아 재벌 2세와 충동적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신데렐라를 꿈꾸는 이번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의 스트리퍼까지.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 네이버 영화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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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설정을 빨아들일 수 있는 주인공들을 내세우지만 그가 만든 이야기들은 천양지차의 각기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성노동자 주인공을 내세울 때 빠지기 쉬운 연민이나 도덕적 잣대, 뻔한 교훈 등이 없다. 이들이 놓인 주변부의 삶은 거칠고 대책없지만 사랑, 질투, 우정, 꿈 등은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 안에서 공명한다. 여성주의적 시각을 지닌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의 그레타 거윅 심사위원장이 ‘아노라’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이고 인도적인(human and humane) 작품”이라고 극찬한 이유다.
할리우드 키드로 자란 숀 베이커는 뉴욕대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상업영화 연출이 꿈이었고, 지금도 마블시리즈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힌다. 하지만 영화를 전공하며 독립 예술영화를 섭렵하면서 켄 로치, 다르덴 형제 등 사실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중 대표적인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밀양’등도 그의 베스트 목록에 들어간 작품들이다. 이들의 영향으로 베이커는 주변부의 삶이나 거리의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작품세계를 쌓아왔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오드시네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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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베이커는 데뷔 때부터 미국 독립영화계의 신성으로 주목 받았지만 그의 어법은 고전적인 이야기 방식에 가깝다. 난해하지 않고 관객을 흡입하는 구심점이 단단하며 코미디적 요소도 강하다. 질투심에 눈이 뒤집힌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몰래 좋아하는 보수적인 동유럽 출신 남자가 벌이는 소동극 ‘탠저린’과 꼬마들과 고집스러운 싸구려 호텔 매니저 간의 아웅다웅 다툼이 웃음을 자아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 그는 어리석으면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 인간의 심성을 코믹 요소 안에 매끄럽게 녹여 넣는다. 철없는 러시아 재벌 2세와 대책 없는 스트리퍼 간의 소동을 그린 이번 수상작 ‘아노라’ 역시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가인 에른스트 루비치와 하워드 혹스의 고전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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