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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행방불명자 이창현군
1980년 5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5·18 행방불명자 이창현 군이 5·18 44주년을 맞아 명예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귀복 씨에 따르면 이 군은 1980년 5월 당시 양동국민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등교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고, 5월 19일 집 밖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걸로 추정됩니다.
생업을 위해 아버지는 전남 지역에서 살고 있었고, 어머니도 생업으로 외출한 상태라 당시 집에는 이 군 혼자였습니다.
이귀복 씨는 "도심을 오가는 군인들의 행렬을 바라보다가 시민들이 외치는 소리가 궁금해 밖으로 나간 것 같다"고 추정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 군의 어머니는 사라진 이 군을 찾기 위해 인근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지만, 이 군의 행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계엄군에게 인상착의를 말하며 행방을 묻기도 했는데, "이 난리에 어디서 찾겠느냐. 집에 가서 남은 자식들이나 잘 돌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전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아픔에 어머니가 1981년 광주를 떠나면서 이 군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아버지는 이 군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이 군에 대해 5·18 행방불명자 신고를 했고, 9년이 흐른 뒤에야 가까스로 이 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1989년 5·18 민중항쟁유가족회의 '광주민중항쟁비망록'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날 비망록 한편에서 시민군에 뒤섞여 있는 아이가 찍힌 사진을 발견하고 이 씨는 이 군으로 확신했습니다.
명확한 검증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원연구원에 감정 의뢰를 했지만, 자료가 유실됐다는 이유로 지지부진한 조사에 소송까지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소송을 담당한 변호인으로부터 이 군이 1980년 5월 21일 죽은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이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청 직원으로부터 1980년 5월 29일 인성고등학교 야산에 묻혀 있던 이 군의 시신을 파냈다는 진술에도 유해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도 5·18 행불자 가운데 10세 이하 어린이들을 분류해 소재 파악에 나섰지만, 행적을 파악할 실마리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국내외 입양기관에도 이 군의 입양 기록·신원 등의 관련 자료는 없었습니다.
5월 27일 옛 전남도청 일대에서 시민군과 모여 있던 한 아이가 이 군인 것 같다는 확실치 않은 진술만 나왔습니다.
광주시교육청은 행방불명자이기는 하지만, 이 군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명예졸업장 수여를 결정했습니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연합뉴스)
김덕현 기자 d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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