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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법안' 홍수 막으려면 … 美처럼 법안실명제로 책임정치 유도

매일경제 문지웅 기자(jiwm80@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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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법안' 홍수 막으려면 … 美처럼 법안실명제로 책임정치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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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밸류업 ◆


"법안 많이 발의했다고 일 잘하는 국회의원이라고 평가해주는 문화부터 바꿔야 합니다. 함량 미달인 법안 발의가 사라져야 각 상임위원회에서도 심도 있는 검토가 가능합니다. 미국처럼 법안실명제를 도입해 자기 이름을 걸고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도록 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한국 국회가 후진적인 행태를 반복하며 '입법 밸류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로 의원과 보좌진의 전문성 부족이 꼽힌다. 정책에 대한 전문성은 차치하고 입법 과정, 법안 발의에 대한 기본기가 부족한 의원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입법 기본기가 부족하지만 의원 입법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런 법안 상당수는 공천 심사에서 점수를 따기 위해 급조된 법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야말로 실적을 위한 보여주기식 입법이라는 것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많은 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국회의원을 평가할 때 법안 발의 건수를 정량지표로 활용하고 있다"며 "내용은 보지 않고 건수만 평가하다 보니 문구 하나, 표현 하나만 바꿔 발의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을 서로 다른 의원이 발의하는 일도 허다하다. 예비타당성 면제 기준을 정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보면 동일한 내용을 많은 의원이 중복 발의했다.

각종 조세 감면, 세액 공제 등을 정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쪼개기 발의가 기승을 부린다. 21대 국회에서 소관 상임위원회인 기획재정위원회에 계류된 것만 352건에 달한다. 건수 채우기에 최적화됐다는 조롱까지 나온다.


함성득 경기대정치전문대학원장은 "균형 재정 목표를 설정한 GRH(그램-루드먼-홀링스)법,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나온 금융개혁법인 도드-프랭크법 등이 미국 의회의 대표적인 실명제 법안"이라며 "한국에서는 2004년 '오세훈법' 이후 20년간 의원 이름이 들어간 법안이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국회의 정책 기능이 얼마나 약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함 원장은 "정치 밸류업의 핵심은 정책과 법안의 밸류업에 있다"며 "미국처럼 법안실명제를 도입하면 함량 미달 법안 발의가 줄고 책임정치와 정책정당 구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22대 국회에서 의원 300명이 임기 내에 자신의 실명을 붙일 수 있는 대표 법안을 한 건씩만 발의해도 의미 있는 법안 300개가 탄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전직 국회 전문위원은 "중요 법안, 제정법 등에 대해서는 대표로 발의한 의원 이름을 법안에 의무적으로 병기하도록 국회법을 개정할 수도 있다"며 "이를 통해 의원들의 책임감을 높이고 법안 품질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법안실명제를 통해 특정 사건이나 사고의 피해자나 당사자를 법안 약칭으로 하는 문화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원들에 대한 평가 방식도 이와 연동해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미 있는 법안이라면 1건만 임기 중에 통과시켜도 공천에 가점을 주는 방식을 채택하면 법안 밸류업이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입법 성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의원들에게 입법에 대한 자율성을 확대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국회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중앙당과 다른 목소리를 좀처럼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정당 내 다양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법안의 다양성과 품질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국회 보좌진 채용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는 것도 22대 국회 밸류업을 위한 핵심 과제로 꼽힌다. 의원들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좌진이 보완해줘야 하는데, 우리 정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책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야를 넘나드는 보좌관이 있긴 하지만 소수에 그친다"며 "정책을 잘 아는 보좌관보다 지역구를 잘 챙기는 보좌관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문성을 발휘해야 할 비례대표마저도 공천이 이상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책 전문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며 "국회의원이 개별적으로 보좌진을 선발하는 현재 시스템을 바꿔 보좌진을 국회 사무처 소속으로 두고, 필요에 따라 각 의원의 정책과 입법을 보좌하는 방식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당 정책연구소의 정책기능 강화도 시급하다. 매일경제가 더불어민주당 정책연구소인 민주연구원과 국민의힘 여의도연구원의 2020~2024년 정책연구 보고서 발간 건수를 분석해 보니, 각 당 싱크탱크의 정책 기능은 갈수록 약화하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양당 정책연구소 지출 예산은 약 70억원씩이다. 특히 양당 정책연구소는 집권당일 때 연구 기능이 크게 떨어졌다. 민주연구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과 2021년 연구보고서를 각각 1건과 3건만 공식 발표했을 뿐이다.

여의도연구원도 야당 시절인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45건, 34건의 보고서를 펴냈지만 2022년 5건, 2023년 9건, 2024년 0건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정책 연구 기능이 눈에 띄게 약화됐다.

[문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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