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방·자경전·집옥재 등 경복궁 북측 둘러보는 '별빛야행' 시작
취향교 건너 마주한 향원정 야경 눈길…높은 관심에 예매 '2분 컷'
경복궁 별빛야행 |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전하의 초대를 받아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일과를 마치고 오느라 시장하실 터이니 요기부터 하시지요."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은 봄밤, 서울 경복궁 외소주방의 불이 환히 켜졌다.
수라간에서 가장 높다는 '하상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손님을 위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왕과 왕비에게 올리던 12첩 반상을 재구성한 '도슭'(도시락의 옛말) 상이었다.
일상의 소란함을 뒤로 하고 밤의 경복궁과 마주한 첫 순간이다.
'소주방'에서 궁중음식 체험 |
지난 2일 오후 참여한 '경복궁 별빛야행'은 조선 왕조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였던 고종(재위 1863∼1907)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 되면서 시작됐다.
본 행사를 하루 앞두고 사전 리허설로 공개된 행사에는 취재진과 경복궁관리소 직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산하 직영보수단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입구에서 받은 번호표를 따라 자리에 앉자 전통 음악이 풍취와 입맛을 돋웠다.
총 4단으로 된 유기 도시락을 열자 너비아니, 더덕구이, 표고버섯탕, 생선완자전 등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받았을 법한 귀한 상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소주방 '도슭수라상' 체험 |
올해 처음 도입된 채식(비건) 수라상에는 새송이버섯전, 두부구이 등이 자리했다. 채식 상에서는 표고버섯탕의 국물도 야채를 우린 채수를 쓰는 등 준비에 신경 쓴 듯했다.
어둠을 밝힐 등을 들고 걸음을 옮기면 문화관광해설사와 '용두'가 대화를 나누듯 곳곳을 소개해준다. 용두는 지붕 위에 올려두는 장식 기와에서 이름은 딴 캐릭터로, 안내자 역할을 한다.
흥선대원군(1820∼1898)이 고종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한 신정왕후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지은 자경전, 궁에서 먹던 각종 장(醬)을 보관하던 장고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밤에 만난 경복궁 |
관람 중간중간 펼쳐지는 작은 공연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에 귀한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음식이고, 그 음식 맛을 관리하는 게 이 장이다. 너의 소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아야 할 것이야." ('장꼬마마'가 궁녀에게 하는 대사 중)
고종이 서재 겸 집무 공간으로 썼던 집옥재 일대는 낮과는 다른 매력을 뽐낸다.
2층 구조의 팔각형 누각인 팔우정과 단층 건물인 협길당이 붙어있는 집옥재 권역은 내부를 도서관처럼 꾸며 개방하고 있다. 벽돌로 쌓은 기둥, 중국의 영향을 받은 처마 장식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별빛야행 |
해설사를 따라 걷다 보면 경복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에 이른다.
일반적인 사대부집의 건축 양식을 따른 건청궁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조선의 여러 정책이 결정됐고, 1887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힌 곳이다.
건청궁에서 나오면 행사의 하이라이트, 향원정 일대의 야경이 펼쳐진다.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다리인 취향교를 오를 수 있는 건 하루 60여 명, 별빛야행 관람객뿐이다.
다리 위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던 고종이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다짐하면서 불을 밝히라 명하자 취향교와 향원정 일대가 화려한 불빛으로 반짝였다.
밤에 만난 경복궁 |
경복궁 안팎에서 일하는 관계자들도 이 순간에는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바라봤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5월 4일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하루 두 차례씩 열린다.
이달 21일까지 예정된 행사는 매진된 상태다. '궁케팅'(궁과 티켓팅을 합친 말)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최근의 상황을 보여주듯 단 2분 만에 매진됐다고 한다.
더 많은 관람 기회를 주고 싶지만, 궁을 보존·관리하려면 제한된 인원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행사에 참여한 천지영 씨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안에서 보고, 듣고,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아 더욱 특별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경복궁 별빛야행 |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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