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산림·문화 보존 힘써…관련 영화 상영도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에 참배하는 추모객들 |
(서울=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한국의 산과 민예(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2일 오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 내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 묘역에 조촐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삼삼오오 모인 참배객들은 '경주법주' 한 잔을 올리고, 차례로 묵념한 뒤 향 앞에서 지방을 태웠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를 보존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데 힘쓴 다쿠미의 93주기를 맞아 서울국제친선협회와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이 마련한 자리.
묘비명처럼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한류팬 1호'의 기일인 만큼 추모식 역시 '한국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가토 타케시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소장은 추도사를 통해 "대학생 시절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마음이 치유됐고 감동을 받았다"며 "이후 다쿠미와 관련된 책과 영화, 자료관을 찾아본 것은 물론 이 묘역에도 개인적으로 여러 번 다녀갔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추모식 역시 다쿠미 선생처럼 한일 관계 개선에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 회장은 "오늘 아침 다쿠미 선생이 부활절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됐다"며 "개신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가 살아생전 몸소 보여준 신앙과 믿음, 인류애를 떠올리며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백자의 사람' 관람하는 시민들 |
행사가 끝난 뒤 망우리 공원 내 망우미디어홀에서는 중랑구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가 상영됐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다쿠미의 반생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으로 지난 2012년 개봉했다.
다쿠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일하며, '오엽송(잣나무) 노천매장법'을 개발하는 등 녹화 사업에 헌신했다. 미술 교사였던 친형과 함께 '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우리 문화재 수집·연구에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 한글을 배우고 한복을 입으며 조선인들을 진정한 친구로 대한 다쿠미는 죽어서도 조선에 묻히길 바라며 '장사도 조선식으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그가 급성 폐렴으로 40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조선인들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설 정도였다고 한다.
sunny1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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