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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는 우크라여야만 해"… 푸틴 돌파구는 가짜뉴스 여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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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테러 배후에 우크라·미국·영국 있다"
당국자·언론·블로거 나서 허위정보 유포
전문가들 "푸틴, 여론전으로 위기 관리"
한국일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테러 사건에 대한 화상 안보 회의를 주재하던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모스크바=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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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트롤'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인터넷 여론조작 조직이 총출동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자행된 모스크바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테러로 궁지에 몰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서다.

안보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를 위해 러시아 당국자뿐 아니라 언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허위정보가 무차별 유포되고 있다. "푸틴의 전형적 수법"이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우크라 연루' 거듭 주장 vs "거짓말 유포"


26일(현지시간) 독일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이날 러시아 매체 '샷(SHOT)' 인터뷰에서 이번 테러 배후가 'IS인가 우크라이나인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우크라이나"라고 답했다.

보르트니코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도 이날 러시아 연방 검찰청 확대회의 후 '미국, 영국, 우크라이나가 공격 배후에 있는가'라는 기자 질문을 받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했다. 그 근거로 '테러범들이 범행 직후 우크라이나로 도주하려고 했다'는 초기 조사 내용을 재차 거론했다. 우크라이나가 연루됐다는 직접 증거는 내놓지 못한 채 '테러를 저지른 건 이슬람국가(IS)지만 우크라이나가 개입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반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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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5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을 반갑게 맞고 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도와 러시아와 함께 서방의 제재 대상이 됐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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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주장은 러시아의 최우방 벨라루스에 의해 금이 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이날 "벨라루스가 신속히 국경 검문소를 설치했기 때문에 테러범들이 벨라루스에 오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갔다"고 밝혔다. 테러범 체포 과정에서 양국 간 긴밀한 공조를 과시하다 이들의 당초 행선지가 우크라이나가 아닌 벨라루스였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조롱을 샀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은 이날 엑스(X)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연루됐다는 러시아의 거듭된 암시는) 중립국들조차 완전히 불신하고 있다"며 "거짓말은 파트루셰프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포되고 그 이후 FSB 수장 보르트니코프에 의해 퍼져나간다"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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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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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언론·블로거 '일사불란' 여론전 나서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트롤 군단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이번 테러 발생이 알려진 지 약 40분 만에 러시아 국영 매체 모스코프스키 콤소몰레츠가 '우크라이나 연루설'을 보도했고, 이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친크렘린 블로거들이 해당 게시물을 퍼나르며 가세했다.

지상파 방송마저 가짜뉴스 유포에 앞장서고 있다. 러시아 국영 NTV는 올렉시 다닐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보좌관이 "오늘 모스크바 일은 재밌다. 우리는 그런 재미를 더 자주 만들 것"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하지만 BBC가 영국 리버풀 존 무어 대학에 의뢰해 확인한 결과, 이 영상은 2개의 다른 인터뷰 영상과 오디오를 짜깁기한 것이었다. 러시아 국영방송 RT의 편집장 마르가리타 시모냔은 엑스(X)에 "테러범들이 (자살용 폭탄 조끼를 입지 않아) 죽을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IS 대원이 아니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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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앞에 모인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모스크바=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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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없어도 배후는 우크라… 푸틴의 돌파구


이처럼 외부의 적을 겨냥한 허위정보 여론전은 푸틴 대통령이 선호하는 위기 관리 방식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전문가 분석을 통해 전했다. 364명이 숨진 2004년 베슬란 학교 테러 때 대응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테러는 러시아의 체첸 침공에 대한 체첸분리주의자들의 보복성 공격이었지만 러시아는 애꿎은 이웃 국가 조지아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2003년 장미 혁명으로 친(親)서방 정권이 들어선 조지아는 푸틴 대통령의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이번 테러를 저지른 IS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러시아를 표적 삼아왔다. 2015년 9월, 푸틴 대통령이 붕괴 직전의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독재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부터다. 러시아가 직·간접으로 지원하는 헤즈볼라, 하마스, 탈레반이 레바논, 가자지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IS와 싸우고 있고,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도 리비아, 모잠비크, 말리에서 IS와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러시아의 칼끝은 IS가 아닌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겨누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을 주로 연구하는 에드워드 레몬 미국 텍사스A&M대학 교수는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 배후에 서구와 우크라이나가 있는 시대가 됐다"고 NYT에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위용성 기자 u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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