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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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류의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닌데, 뭐가 씌었는지 이 넷플릭스 드라마는 시즌1~3를 모두 정주행했습니다. 주인공은 파리에 파견나온 한없이 긍정적인 성격의 미국 홍보 회사 직원 에밀리. 그리고 에밀리가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아시안 친구 민디가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낮에는 보모로 일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가수로 노래하며 열심히 사는 민디는 알고 보면 중국 갑부의 딸입니다. 자유롭게 살겠다며 사서 고생을 하는 민디를 연기하는 배우는 한국계 미국인인 애슐리 박입니다.
에밀리,파리에 가다 포스터. 맨 왼쪽이 애슐리 박 / 넷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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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하(目下) 할리우드 시상식 시즌을 휩쓴 "성난 사람들(Beef)"에도 애슐리 박이 나옵니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나오미. 아마도 일본계인 모양입니다. 스티븐 연을 비롯해 모두 6명이나 되는 한국계 배우가 나오는 "성난 사람들"에서조차 애슐리 박은 자신의 민족정체성과는 다른 캐릭터를 맡았네요.
요즘 같은 세상에 혈통에서 말미암은 문화적 정체성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 중요합니다. 폐쇄적이라서가 아니라 개방적이기 위해서 오히려 중요합니다. (한국계 배우는 한국인 역할만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한국인 배우들이 받았던 설움과 부당함을 잊지 않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각자들을 상기하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 * *
할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배우는(국적 불문 한국인과 재미교포를 통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장남 안필립(1905-1978)입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황금기인 193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한 안필립은 지난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아시아계 배우였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당대의 할리우드 스타인 게리 쿠퍼,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웨인, 클라크 게이블, 프랭크 시나트라, 험프리 보가트 등의 주연 작품에 출연하며 그들과 직접 호흡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필모그래피의 상당 부분에서 중국인 형사나 하인, 일본군 장교 등의 역할을 맡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유색 인종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하류 인생뿐이었고, 그나마도 서양에 잘 알려진 중국인이나 일본인 역할이 대부분이었던 겁니다.
1960년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도 오드리 헵번의 이웃 주민인 신경질적인 일본인 역할을 동양인도 아닌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이른바 '화이트 워싱'이 버젓이 벌어지는 판이었으니, 안필립이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과 정체성 무시는 오죽했을까요.
두 번째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인은 목포 출신의 오순택(1933-2018)입니다. 연대 정외과를 나와 UCLA 대학원에서 연기 및 극작을 전공한 그는 1965년 브로드웨이 연극 "라쇼몽"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해 "맥가이버", "미녀 삼총사"같은 TV 드라마와 "007", "최후의 카운트다운" 등 100편이 넘는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1998)"에서는 뮬란의 아버지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고요.
특히 한국인 배우 최초로 "007" 프랜차이즈 9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에 출연해 4대 007인 로저 무어를 돕는 영국 정보기관의 홍콩 주재 요원 역할을 맡아 로저 무어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이 영화 덕분에 태국 푸켓의 섬 아닌 섬이 '제임스본드섬'으로 유명해졌죠)
세계 최고의 첩보물인 "007" 출연 제의를 받은 오순택은 처음에는 -그가 할리우드 데뷔 때부터 줄곧 해야했던- 세탁소 주인이나 하인, 정원사 같은 역할이면 안하겠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동양인 배우들에게 주로 그런 역이 주어졌거든요. 그들은 보안상 지금 말해줄 수 없지만, 그런 역은 아니라고 했어요. 계약서에 사인했죠."(2012년 경향신문 인터뷰)
점차 비중있는 조연 역을 맡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인을 연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미 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작된 커크 더블라스, 마틴 쉰 주연 할리우드 영화 "최후의 카운트다운(1980)"에서 오순택은 미 항공모함 니미츠호에 포로로 붙잡힌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로 나와 일본어로 대사를 칩니다. 당시에는 한국사람이 나오는 영화가 없었던 거죠.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 일본군을 연기한 오순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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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편견과 장벽은 견고합니다.
2019년 골든글로브에서 "킬링 이브"로 TV드라마 부문 아시아계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는 일찌기 2005년에도 "그레이 아나토미"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과 미 배우조합상 여배우상을 받는 등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에미상 후보에도 여러 차례 올랐지만 번번이 물을 먹어 에미상의 인종차별의 사례로 늘 거론돼왔습니다.
지난해 재미있게 봤던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The Chair)"에서 주연을 맡은 샌드라 오는 미 명문대 최초의 유색 인종 학과장 역을 연기했는데, 그 학과장이 '김지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계라는 게 발전이라면 발전일까요. * * *
그런데 며칠 전 바로 그 에미상에서 한국계 감독과 배우가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격세지감입니다.
2002년 "007: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서 한국계 배우 릭윤은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몰입감을 깼지만, 2023년 "성난 사람들"에서 스티브 연은 거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합니다. 아예 이야기 자체가 한국계 미국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설렁탕에 깍두기를 먹고, LG 가전 제품을 씁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열렸습니다. 6편의 영화가 상영됐고(저는 이 중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처음 봤고, "콜럼버스"를 재재관람했습니다) 이 영화들의 주역인 스티븐 연과 정이삭 감독, 존 조 배우, 저스틴 전 감독 겸 배우의 공동 기자회견도 열었습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왼쪽부터 저스틴 전, 정이삭, 스티븐 연, 존 조 ⓒstroryd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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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스티븐 연은 "코리안 아메리칸이 만든 작품에 한국인들이 공감하는 상황에 기쁨을 느꼈다"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감하고 화합할 수 있다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파친코"를 공동 연출했던 저스틴 전 감독도 "그동안 (미국) 주류 사회가 우리와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는 백인 동료가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이 너무 좋고, 그들이 한국 문화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다른지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할리우드의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콜럼버스", "서치" 등에 나왔던 존 조 배우는 지난해 '마리끌레르' 부국제 특집 기사에서 "배우로서 일을 시작했을 무렵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백인이 아닌 캐릭터를 인간성있는 존재나 내면적 삶을 가진 역할로 그리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주인공의 서술적인 역할 위주였기에 배우로서 내가 맡은 역할에 연결되는 느낌을 받거나 작품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콜럼버스"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건축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의 소도시 콜럼버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과 건축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저명한 한국인 건축학자를 아버지로 둔 재미교포 번역가 역할을 맡은 존 조는 인간성과 내면적 삶을 가진 주인공을 연기하며 지성과 감성을 발산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코고나다도 한국계로 "파친코", "애프터 양" 등 수작을 연출했습니다.
"파친코", "성난 사람들"이 수준급 드라마라면 지난해 할리우드에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또 어떻구요. 한국계 캐나다인인 셀린 송 감독은 이 데뷔작으로 일약 할리우드의 기린아(麒麟兒)로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뉴욕에 사는 코리안 아메리칸의 일과 사랑 이야기입니다. * * *
할리우드 1세대 배우 오순택은 할리우드에서 미국식 이름이나 예명을 짓지 않고 오순택(Soon-Tek Oh)'라는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지난 2018년 그가 타계하자 뉴욕타임즈는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맞선 배우 오순택, 85세로 별세하다'라는 제목의 긴 부고 기사(obituary)를 실었습니다.(뉴욕타임즈의 부고 기사는 정평이 나있는데, 이를 다룬 "Obit."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뉴욕타임즈 오순택 부고 기사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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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순택이 1965년 아시아계 동료 배우들과 주도적으로 설립해서 아시아 배우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힘써 온 '이스트 웨스트 플레이어스'(East West Players)라는 단체 관계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전했습니다.
'오순택은 할리우드라는 험난한 지형을 헤쳐가면서'끊임없이 저평가되고, 평가될 때도 자주 오해되는,(constantly underrepresented and, when represented, was often misinterpreted) 문화적으로 풍성한 자신의 출신 커뮤니티를 훼손하지 않는 뛰어난 스토리텔러였다.'
오순택은 2011년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약소 민족의 한이 많이 맺혔습니다. 제가 대작을 여러 편 했지만 진짜 주연은 한 번도 못 하고 조연만 했어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제가 연기력이 그네들만 못합니까, 공부를 그네들만큼 못했습니까?"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을 휩쓴 이성진 감독은 원래 '소니(Sonny)'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Sonny Lee'. 출석 부를 때면 늘 창피했다던 그가 숙제를 제출할 때 써낸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Lee Sung Jin'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립니다. 2019년 "기생충"이 미국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미국인들이 봉감독의 이름을 부를 때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 "라이스보이 슬립스", "파친코", "리턴 투 서울", "패스트 라이브즈"... 이제 코리안 디아스포라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도, 우리 모두는 다 어느 정도 경계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이런 수준 높은 코리안 아메리칸 디아스포라 영화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데는 인종차별과 편견 등 할리우드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반을 다져나갔던 1세대 배우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리우드의 부당한 대우에 '성난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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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논설위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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