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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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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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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윗선에 통화를 한 후 ‘위급상황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했다.”



지난 11일 광주에서 열린 ‘오월의 대화’ 시민토론회에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발표한 조사활동 요약문의 내용이다. 조사위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 앞 첫 집단발포와 관련한 김길수 3공수여단 16대대장의 진술을 확보했다. 진술 내용은 “(1980년 5월20일) 이날 밤 실탄 배분과 발포 명령은 최 여단장(준장)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윗선의 명령을 받아 행하였다”는 것이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1997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에서 “(실탄 지급 명령은)대대장의 건의를 받아 제가 내린 결정이며, 위협용으로 사용을 하고 그 밖의 목적이 있을 때는 사전에 보고를 하고 사용을 하라고 했다”고 답변한 바 있다.



3공수여단은 1980년 5월20일 광주에 추가로 투입돼 광주역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던 부대다. 이 집단발포로 시민 5명이 숨졌다. 계엄군이 시민군들한테 군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제시한 자위권 보유를 천명(계엄사 5월21일 저녁 7시30분)하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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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6일 최규하 대통령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는 전두환에게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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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권 보유 천명 전 발포를 명령한 ‘윗선’은 누구일까? 윤영기 보안사 본부대장은 조사위에 “전두환이 광주에 현장 출동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직접 소통했다”고 진술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 정치군인집단이다. 육사 13기인 최세창은 하나회의 핵심으로 12·12 당시 직속 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김창세역의 모티브 인물이 최세창 3공수여단장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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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의 검찰 진술. 검찰 수사 기록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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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전 실탄이 배분됐다는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계엄군은 이날 아침 8시 전교사 사령관이 광주와 전남, 전북에 진도개 하나를 발동했다. 조사위는 “진도개 하나 발령은 실탄 분배(1인당 60발),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상황으로 발포와 직결됐다”고 밝혔다. 계엄군은 진도개 하나 발동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일부 병력에 실탄이 분배됐고, 위협사격을 한 뒤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조사위는 “5월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사격 통제가 없이 30여분 동안 고의적인 발포를 한 것은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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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김창세 역의 모티브가 최세창 3공수여단장.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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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위는 1980년 5월20·21일 발포엔 5·18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군 정식 명령 계통을 제치고 발포명령 등 작전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진술도 확보했다. 그간 전두환·이희성·주영복·황영시·정호용 등 5명은 광주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 새벽 시민들을 학살한 혐의(내란목적살인죄 등)로 처벌을 받으면서 발포 명령을 포함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기간의 발포 책임자를 지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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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2019년 보도한 육군 제2군사령부(영호남·충청지역 관할)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나오는 ‘전 각하’ 메모.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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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린 당시 보안사 정보처 정보과장은 조사위에 “진압작전의 지휘는 계엄사령관, 특전사령관, 전교사사령관, 20사단장이 했다. 그러나 총체적인 책임은 전두환 사령관의 책임이다. 12·12 이후로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박경석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은 “발포명령은 문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발포는 보안사 계통에서 지시가 간 것이다. 5·18의 총책임자는 만인이 아는 것처럼 전두환이다”라고 조사위에 진술했다.



전두환이 5·18 당시 작전에 관여·개입한 정황도 확인됐다. 조사위는 “전두환이 80년 5월24일 언론사 편집부장 간담회에서 ‘오늘도 무기반납을 저녁 6시까지 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나로서는 이틀 정도 더 기다리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무산되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점도 정황 증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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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 주최로 광주 전일빌딩245에서 열린 5·18진상조사위 조사활동 관련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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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2군 사령부가 작성한 문건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의 5월21일 회의 내용에 ‘전 각하께서 초병에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이라고 기재돼 있다. ‘전 각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의미한다. 또 5월23일 회의 내용에 ‘24:00~03:00 어간 작전’에 대해 ‘각하께서 굿 아이디어’라고 기재된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필적 조사를 통해 2군 작전 관련자의 글씨체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위는 17개 직권조사 과제(4건 병합) 중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발포경위 및 책임소재’ 등 6건을 전원회의에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조사위는 “구체적인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를 주력으로 살폈으나 진술 조사와 기록조사를 통해서도 구체적인 특정을 할 수 있는 입증자료가 부족해 결국 ‘진상규명 불능’ 결정했다”며 “‘불능 결정’은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일 뿐 사건이 없었다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불능 처리된 과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유를 보고서에 적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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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제공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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