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진화하는 e스포츠 유소년 육성 시스템
특성화고에 e스포츠과 속속 설립…게이밍 부스 마련해 실전처럼 연습, ‘게임 교과서’ 자체 제작 하기도
프로구단은 유망주 직접 육성… 성과 좋으면 입단 기회 제공
1군 목표로 하루 12시간씩 훈련… 학부모도 수면-식단 관리 도와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은평구 은평메디텍고에서 e스포츠과 1학년 2반 학생들이 정규 수업 시간 중 옆 반과 리그오브레전드 자체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박정진 은평메디텍고 e스포츠 교사(뒷줄 가운데)가 학생 뒤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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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0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유리로 둘러싸인 게이밍 부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형광 조명으로 빛나는 부스에는 최첨단 게이밍 컴퓨터 10대와 헤드셋, 마우스 등 게임에 필요한 장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컴퓨터 전원을 켜고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에 접속하며 몸을 풀었다.
언뜻 방과 후 PC방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등학교 교실. 시간은 2교시 수업이 시작되는 평일 오전 10시였다. 이날 학생들의 게임 훈련은 어엿한 정규 수업이었던 것. 2020년 국내 고등학교 최초로 e스포츠과를 설립해 프로게이머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서울 은평구 은평메디텍고에서는 ‘제2의 페이커(이상혁)’를 노리는 학생들이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페이커’는 지난해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에서 금메달을 따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 선정 ‘올해의 스포츠 파워 톱10’에 오른 유명 게이머다.
● 정규 수업에 연습경기, ‘게임 교과서’까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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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업은 5 대 5 스크림(연습경기)으로 진행됐다. 은평메디텍고 e스포츠과에 지난해 입학한 1학년생은 총 40명. 그중 1반과 2반을 대표하는 학생끼리 맞붙었다. 스크림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학생들은 ‘자습’을 했다. e스포츠과의 자습은 개인 훈련이나 자신의 예전 게임 영상을 돌려보며 분석하는 것을 뜻한다.
학생들이 헤드셋을 끼고 준비를 마치자 e스포츠 교사인 박정진 씨(32)는 학생들과 어떤 ‘챔피언’(롤 게임 캐릭터)을 고를지 상의하며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상대 팀 위치 찾았다”, “(상대 팀) 모두 살아 있으니 아래로 오는 거 조심해라” 등 서로 경기 상황을 빠르게 알리며 소통했다. 박 씨는 어떠한 조언도 없이 뒤에서 학생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약 30분간의 경기 끝에 결과는 2반의 아쉬운 패배. 게임이 끝난 후 박 씨는 아이들을 모아 차분히 경기에서 나온 실수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박 씨는 “실제 프로 구단에서도 경기 직후 이런 식으로 피드백한다”며 “실전과 가장 유사한 형태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에 참여한 김동현 군(17)은 “팀원들과의 합이 맞지 않은 것이 오늘 패배의 원인”이라며 “기량을 보완해서 프로에 꼭 진출하고 싶다”고 전했다.
학생 평가 방식도 독특하다. 실습 평가에서 학생들은 ‘딜량’(상대에게 피해를 준 정도), ‘킬(상대 플레이어 처치) 수’ 등 게임 역량을 세분화한 지표로 평가받는다. 서술형 시험에서는 게임에 대한 기본 전략과 주요 상황별 대응 과정을 중심으로 본인의 생각을 적어야 한다. 이 학교는 최근 교육청에서 직접 인가를 받아 e스포츠 관련 교과서를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e스포츠 훈련 및 실습, e스포츠 선수 심리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이 학교처럼 e스포츠과를 갖춘 고등학교는 지난해 말 기준 전국 4곳이다. 서울 2곳, 전북 1곳, 경남 1곳 등이다. 올해 부산에도 2곳 신설될 예정이다. ‘테란 황제’ 임요환(스타크래프트)과 ‘카트 천재’ 문호준(카트라이더)처럼 ‘e스포츠 황제’ 발굴을 위한 국내 유소년 시스템도 함께 진화하고 있는 것.
최정훈 은평메디텍고 e스포츠 담당 교사는 “수년간 학생들의 요구를 파악해 시대에 맞는 과를 개설할 수 있었다”며 “이제는 게임도 하나의 스포츠이자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교육 배경을 설명했다.
● 프로 구단이 아카데미 차리고 유망주 육성
지난해 12월 19일 e스포츠 프로구단인 ‘젠지e스포츠’의 서울 강남구 사옥에서 챌린저스(2군)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젠지 아카데미 출신인 이들은 이달 중순 개최 예정인 2024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 챌린저스 리그 출전을 앞두고 있다. 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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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 외에도 프로 입단을 꿈꾸는 개인 연습생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해졌다. 프로 e스포츠 구단이 운영하는 게임 전문 교육기관인 ‘아카데미’가 대표적이다.
과거 프로 구단은 나이에 비해 높은 티어(Tier·게임 내 등급)를 가진 개인에게 직접 연락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영입했다. 최근엔 유망주를 ‘떡잎’부터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좋은 성과를 낸 이들에게 입단 테스트 등 프로의 기회를 열어 주는 쪽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아카데미 입단 테스트에는 수많은 지망생이 몰려 그 자체로 게임업계의 ‘빅 이벤트’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달 중순 열리는 2024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 챌린저스 리그(2군 리그) 출전을 준비하는 ‘젠지 챌린저스’ 팀 선수들이다. 이들은 구단 아카데미의 ‘장학생’으로 지난해 전국의 아마추어 롤 대회를 휩쓴 뒤 11월 27일 ‘원 팀’으로 함께 구단 2군에 콜업(승격)됐다.
지난해 12월 19일 서울 강남구 젠지 e스포츠 사옥에서 만난 젠지 챌린저스 팀 주장 ‘토예’ 박동현 선수(21)는 “주변 (프로) 지망생보다 나이가 많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했는데 정말 아슬아슬하게 입단했다”며 “프로의 책임감이 무겁지만 다가오는 시즌에서 실력을 증명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2003∼2005년생으로 이뤄진 젠지 챌린저스 팀은 모두 초등학생 시절부터 롤 1세대 게이머들의 활약을 보며 프로게이머를 꿈꿔 왔다고 한다. ‘슬레이어’ 김진영 선수(21)는 부모님을 설득해 지난해 대학을 휴학하고 프로게이머가 되기 위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다른 구단에서 주최하는 연습생 선발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한 끝에 아카데미에 입단할 수 있었다. 막내 ‘둘리’ 박솔범 선수(19)는 이번 시즌 초 박동현과 함께 밥 먹는 시간까지 줄이며 30시간 연속으로 게임을 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마스터’(상위 0.56%) 티어에 도달해 자신의 실력을 구단에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프로가 됐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1군 콜업’이라는 최종 목표가 남아 있다. 매일 오후 1시에 연습실로 출근한 후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팀 연습, 7시부터 10시까지 또다시 팀 연습을 진행하고 있다. 팀 연습이 끝난 후에는 다음 날 오전 3, 4시까지 개인 연습을 한다. 하루 평균 12시간가량 게임 훈련에 시간을 쏟는 셈이다. ‘달리아’ 황인준 선수(20)는 “휴가도 반납하고 남들 쉴 때 게임에 집중하는 만큼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전했다.
● 부모가 ‘프로 지망’ 자녀 식단 관리하며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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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육성군) 대회 역시 성장 중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첫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e스포츠 대회인 ‘대통령배 아마추어 e스포츠 대회’는 2007년 시작 이래 올해 18년째를 맞이했다. 개최 당시 8개 지역 270명 선수로 시작한 대회는 지난해 16개 시도(세종 제외)에서 총 1027명이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종목도 롤과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등 3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국내 e스포츠 아마추어 선수는 200명이다. 2022년 143명에 비해 약 40% 증가한 수치다. 나이별로는 만 17∼19세가 54명(27%)으로 가장 많았고, 만 16세 이하도 6명(3%) 있었다. 종목별로는 롤 선수가 149명으로 가장 많았고, ‘배틀그라운드’(16명), ‘카트라이더: 드리프트’(14명), ‘오버워치(14명)’ 등이 뒤를 이었다. 최근 10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발로란트’도 지난해 처음으로 아마추어 선수(7명)가 집계됐다.
프로게이머가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자 자녀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학부모도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T1 e스포츠 아카데미에 다니는 윤지우 군(15)의 어머니 조근숙 씨(49)가 그중 한 명이다. 조 씨도 처음엔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아들을 말릴지 고민했지만, 방과 후 왕복 3시간이 넘는 아카데미를 군말 없이 개근하는 아들을 보며 ‘좋아하는 것을 밀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최근엔 “게임도 체력”이라며 직접 아들의 운동과 수면시간, 식단까지 관리해 주며 전방위로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9일에도 아들의 진로 상담을 위해 아카데미를 찾은 조 씨는 “아직도 게임은 낯설지만 아들을 위해 구단 입단 설명회에도 다녀왔다”며 “이제는 공부보다는 기술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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